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얼음조각을 수놓은 듯 작고 하얗게 빛나는 11월의 첫 눈
바람을 타고 말간 빗방울처럼 뺨에 가 닿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하얀 눈들... 그 속에 한참을 서 있다 문득 법정스님의 글에 인용되어 있는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진종일 일없이 앉았노라니
하늘이 꽃비를 뿌리는구나
내 생애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표주박 하나 벽 위에 걸려 있네
훅 불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길을 걷다
홀연 불어 들어온 시 한편이
화두처럼 내 가슴에 불을 지폈다.
내 생애에 남아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유한한 생의 길 위에서 나는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남겼으며,
그리하여 지금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누가 됐건 한 생애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찬란한 아침햇살과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이 우리 모두에게 고루 주어진 것처럼
즐거움이 되었든 괴로움이 되었든 겸허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그 빛으로 새 날을 이루어야 한다고.
나는 과연 그러한 존재로 살아왔는가.
아니,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은 모두 접어두고서라도
지금 이 순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가.
어둠이 걷히고 빛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이 아침에
나는 진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시절의 어둠은
스스로가 빛이 되지 못함으로 인해 화석이 되어버린
생의 흔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무엇으로 빛을 삼을 것인가.
그것은 생을 긍정하는 마음이다.
첫눈을 맞을 때의 설레임처럼.
나비가 되려는 애벌레의 꿈처럼
봄이면 다시 꽃으로 피어나리라는 어린 씨앗의 믿음처럼
나라고 믿었던 생의 껍질을 벗어내고
다시 빛 아래 서야 한다.
가슴에 물기가 어려 온다.
스님의 글이 오늘 내게 희망이 되었듯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리라.
첫 눈이 내리는 이 계절, 설레임으로
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를 가슴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