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 읽어두긴 해야겠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신문이나 잡지의 관심/해당부분 을 오려서 보관해둔 경험이 대개들 있을 것이다. 나도 그때 읽으면 될 것을 훗날을 기약하며 대책없이 방치해두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던 어느날, 캐비넷을 정리하 다가, 이미 며칠이 지나버린, 동아일보 문화란을 발견했는데, 내가 처박아둘 당시, 꼭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눈 여겨둔 사라마구의 [ 예수의 제2 복음 ] 기사를 발견했 다.
소설인 이 책은 제목으로 얼추 보기엔, 무슨 정통 기독교 강론을 소설화한 것 이 아닐까 짐작케 할런 지 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 로마 교황청에서 유감을 표시 했다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면, '그게 아니다'라는 걸 알게된다. 내가 이 책을 보 고 있는 걸 누가 보더니, ' 이 책, [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같은 거 아닌가?'라고 묻는다. 내가 그 책을 안 봤으니, 알 턱이 없지만, 교회에서 '적'으로 규정하고 있 으며 신성모독적 글쓰기를 수행했다는 측면에선 공통점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저자, 사라마구는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부단히 권력과 부패한 종교집단 에 긴장관계를 유지해온 지식인이다. 그런 그의 눈에, 논리적 '모순투성'인, 성경(聖經)이 온전히 수용되었을 턱이 없 었을 것은 당연한 이치. 최근 무신론Atheism과 불가지론Agnosticism에 관심을 기울 이고 있는 내게, 픽션화되어 성경을 공격한 글이 있다는 것은 무게있는 수확이다. 내가 이해를 잘못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문열의 [ 사람의 아들 ]의 경우도, 내 가 치관 수정을 급진전 시키는데 일조했음은 부인할 수 없고, 나는 그것을 일종의 athe ism의 문학화된 표현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좌우간 이 소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경에서 흔히 봉착하게 되는 여러 의문사 항들-그것을 의문시했을 경우, 통상 '신성모독'으로 내몰리기 마련인-에 대해, 상식 을 지닌 객관적 시선을 통해 재번안해낸 점일 것이다. 그러한 작가 사라마가의 검열 되지 않은 의심과 상상력이 교단을 긴장시켰을 거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 이 소설에선, 수태고지 비슷한 것을 받는 장면이 나오긴 하나, 사전에, 남편 요셉과 성관계를 먼저 갖도록 설정함으로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생물학적 근거를 전제시 키고 있다.
또 아버지 요셉이 헤롯왕의 지시(3살 미만의 아이던가??를 전부 몰살시 키라는 명령)를 미리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피난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무고한 생명들이 요셉의 침묵으로 죽음 을 당하게 만든 것 또한 이 소설에서 예수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즉 수많은 희 생을 통해 자신이 이 땅에 살아있음에 대한 죄책감-과 이기적 부친에 대한 극복의지 와 같은 끊임없는 딜레마로 작용한다. 그 밖에, 예수가 막달아 마리아와 동거를 하는 대목, 총각(?)이던 예수가 마리아 를 통해 성(性)에 대해 깨닫게되고, 그것을 통해 한층 성숙하게 된다는 소설 플롯은 인간적이다.
부분 부분 예수가 그의 제 2의 아버지(?)인 하느님에게 회의를 드러 내고,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 하느님보다 악마의 논리가 보다 인간적인 대목등도 눈 여겨 볼 만하다. 특히 성경에서 설정하고 있는 '이기적인 신'에 대해, 소설에선 예 수가 어린 양을 불쌍이 여겨, 제물로 바칠 것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아래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들(경배자)은 모두 같은 제물을 바치고, 천상의 하느님 은 이 모든 학살의 향기를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들이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자의 번역은 좀 거칠고 너무 직역이어서 읽는데 방해가 된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