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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원제대로, 미술사와 현대 대중매체를 통틀어 보았 을때, 우리들이 사물을 어떻게 보도록 길들여졌는가에 대한 얘기 를 큰 묶음으로 취급하는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이 번역되면서 '이미지'로 표기된 것은 아마도 저자가 글 서두과 말미에서 수미쌍관으로 두번 인용하는 '본다는 것은 말에 선행한 다.'에 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미지'라는 것, 말이나 문자가 아니라, 시각매체라는 것은 언제나 호소력이 크다.

어느 책(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에서 보니, 사람의 인지능력을 좌우하는 두가지 감각,시각과 청각중,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선 시각이 청각을 몰아낸 형국이라고 논평 한 것을 읽은 것이 있다. 그것은 현대 자본 산업사회가 온갖 상 업적, 정치적 이윤을 위해, 청각보다는, 호소력이 큰 시각에 승 부를 걸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요샌 아예 포스트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러한 여권 신장운동 의 미술사적 이론의 정립이 72년 남성작가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저자는 서양미술사에서 다뤄지는 여성 이란 것이 '이중성'으로 특징지워진다고 정리한다. 하나는 여성안의 감시하는 자아가 있고(이는 남성적이다.) 감 시를 받는 자아가 있다(이는 여성적이다).여성의 벗은 몸을 보고 美를 판단하는 남성관객의 전형을 이미지 화 한 것인데,이것이 요새의 '미인대회'의 순수한(?) 아키타입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는 [누드]의 저자인 美術史家 '케네스 클락'을 인용하면서 벗은것은 순수한 것이지만, 누드는 예술의 형태이며 이것이 바로 '보여주기 위해' 그려진 서양 누드화의 근거라고 말한다. 즉 서 양 누드화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자의적인 포즈라기 보다는 그 그림의 소유자가 될 남성관객들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요 량'으로 포즈를 선택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 사례로 저자는 앵그 르의 [오달리스크]와 그 와 흡사한 포즈를 취한 -- 내가 보기엔 전혀 흡사하지 않았지만...-- 광고의 누드 여성을 비교하며 두 작품이 취하는 공통적인 기호, 즉 상업성을 들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3장의 결론도 이러한 서양미술사의 상 품으로서의 여성이 오늘날 상업광고속의 섹슈얼리티로 계승된다 고 추가하고 있다. 4장도 도록만 나온 장이라서 내용은 생략. 5장은 서양화, 그 자체랄 수 있는 유화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다. 유화의 정치성이 여기서 거론된다. 즉 유화는 재현된 사물 에 대한 소유욕을 강화시킨다는 것이고, 그것은 유화가 지닌 실 물성과 마티에르, 또 무엇보다 유화의 보존능력을 통해 지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여기서 저자가 다루는 시대는 유화의 전성기인 르네상스 이후와 모더니즘 이전이다. 당대의 주류로서의 '아카데미 회화'와 유화의 유기적 밀착성이 저자의 관심이다. 즉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 어느 시 대 예술이든 예술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관심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유화가 봉사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 기는 무엇보다 재산에 대한 과시욕과 소유욕이다.

물론 7장에선 광고와 예술이 지니는 차이점도 거론하고 있다. 요컨대 예술(유화)이 이미 있는 자에게 영구한 만족감을 제공한 다면, 광고는 없는자에게 현재의 빈곤을 부각시켜 그 욕구불만을 충족시키도록 충동질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즉 그 둘은 노리는 표적부터가 다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 둘은 표적은 달라도 기본 목적은 변함이 없다. 그것은 바로 '현실' 이 아닌 '현실같은 것'을 동원해서 허상을 생산하고 그 허상에, 우리들의 가치판단과 視覺을 익숙케 만들고 차마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과연 '제대로'보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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