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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사이토 고헤이
  • 14,400원 (10%800)
  • 2021-10-19
  • : 3,807

‘시민영화‘로 만들어진 전력 네트워크와 노동자협동조합은 일부사례에 불과하다. 교육, 의료, 인터넷, 공유경제sharing economy 등 ‘근본적 풍요‘를 되찾을 가능성이 도처에 있다. 가령 우버Uber를 공유화해서 그 플랫폼을 ‘커먼‘으로 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다른 예로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약은 전 세계의 ‘커먼‘이 되어야할 것이다.
‘커먼‘을 통하면 사람들은 시장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산 활동의 수평적 공동 관리를 사회전체에 확장할 수 있다. 그 결과, 지금껏 화폐 때문에 이용이 제한되던 희소한 재화와 서비스가 풍요로운 것으로 바뀐다. 즉, ‘커먼‘의 목표는 인공적 희소성의 영역을 줄이고, 소비주의 · 물질주의와 결별한 ‘근본적 풍요‘를 늘리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커먼‘을 관리할 때 반드시 국가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물은 지방자치단체가 관리할 수 있고, 전력과 농지는 시민들이 관리할 수 있다. 공유경제라면 앱의 이용자들이 함께 관리할 수 있다. IT를 활용해서 ‘협동‘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근본적 풍요‘가 회복될수록 상품의 영역은 좁아진다. 그렇기에 GDP는 감소한다. 탈성장인 것이다.- P265
매일 만원 전철에 시달리고 컴퓨터 앞에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며 장시간 노동하는 생활과 비교하면 훨씬 여유 있고 넉넉한 인생이다. 스트레스를 온라인 쇼핑이나 고농도 알코올음료로 해소하지 않아도 된다. 손수 밥을 짓고 운동할 시간이 생긴다면 건강 상태 역시 크게 개선될 게 틀림없다.
우리는 경제 성장의 덕을 보기 위해 지나치게 최선을 다해 일했다.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은 자본에 무척 바람직한 상황이다.
하지만 희소성이라는 본질을 가진 자본주의 내에서 풍요를 목표로 한들, 모두가 풍요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 P266
궁핍한 생활을 참고 견디길 강요하는 긴축 시스템이란, 외려 인공적 희소성에 근거한 자본주의에 해당한다. 우리는 충분히 생산하지 못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희소성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기에 가난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가치와 사용가치의 대립‘을 떠올려보자.
그간 신자유주의에서 이뤄진 긴축 정책은 인공적 희소성을 늘리고 강화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정확히 부합하는 정책이었다. 그에 반해 풍요를 추구하려면 경제 성장의 패러다임과 결별해야 한다.
‘근본적 풍요‘를 내세운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Jason Hickel도 다음처럼 말했다. "긴축은 성장을 일으키기 위해 희소성을 추구하지만, 탈성장은 성장을 필요 없게 하기 위해 풍요를 추구한다. "
이제 신자유주의에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반反긴축‘이다. 하지만 단순히 화폐를 흩뿌리기만 해서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수 있을지언정 자본주의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인공적 희소성에 맞서기 위한 대항책이란, ‘커먼을 복권시켜 ‘근본적 풍요‘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탈성장 코뮤니즘이 목표하는 ‘반긴축‘이다.- P268
얼핏 보면 자본주의는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추구되는 것은 무제한적인 물질적 욕구 충족이다. 뷔페식당, 계절마다 버려지는 옷, 무의미한 브랜드화, 이 모두
‘필연의 나라‘에 만연한 동물적 욕구와 얽힌 것이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가 추구하는 ‘자유의 나라‘는 바로 그 물질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집단적이고 문화적인 활동의 영역에야말로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자유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성장만 좇으며 사람들을 장시간 노동과 제한 없는 소비로 떠미는 시스템을 해체해야 한다. 설령 총량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 생산이 줄어든다고 해도, 전체를 보았을 때는 행복하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향한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마구잡이로 생산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자제를 하여 ‘필연의 나라‘를 축소하면
‘자유의 나라‘가 확대될 것이다.- P271
그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쓸데없이 자연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 여기서도 ‘자기 억제‘가 점점 중요해지는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골라내어 생산을 중지하고, 계속 생산한다 해도 어느 정도 선에서 그만둘지 선진국에 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억제 없는 소비에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자본의 전제‘ 아래에서는 자기 억제의 자유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자기 억제를 하지 않는 것이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의 조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행위라고.
무한한 경제 성장을 단념하고 모두의 번영과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자기 억제야말로 ‘자유의 나라‘를 확장하여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낼 것이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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