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4
작은 서재
  • 러브 레플리카
  • 윤이형
  • 13,950원 (10%770)
  • 2016-01-13
  • : 2,033

  ‘너’는 딸기에게는 루카이고 아버지에게는 예성이다. ‘오직 하나뿐인 진짜 이름 같은 건 세상에 없다’는 소설 속 말처럼, ‘너’의 이름은 하나가 아니며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이름은 바뀔 수 있다. 여기서 ‘너’가 갖는 다양한 이름은 한 개인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으로 볼 수 있다. ‘너’는 가족들에게는 예성이었을 것이고 딸기를 비롯한 퀴어 커뮤니티 사람들에게는 루카였을 것이며 강사로 일하던 학원에서는 선생님이었을 것이다. 또 아침마다 찾아가는 영화관에서는 관객 중 하나로 존재했을 것이며 이 밖에도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이름을 가진 한 인물에 대한 소설인 「루카」에는 정작 ‘루카’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의 화자 딸기는 루카의 아버지와 만난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예성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딸기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루카와의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루카와 자신의 관계를 설명한다. ‘너’의 목소리는 직접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아버지의 말에서 ‘예성’을, 딸기의 말에서 ‘루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성은 기독교인이면서 클로짓 게이이고, 가족들에게 커밍아웃 하지 못한 채 아웃팅 당했다. 목사인 아버지는 예성을 죽은 사람 취급했다. 아버지의 삶에 주어진 이념과 삶의 방향은 기독교였고 그 기독교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취급했다. 예성은 기독교 사회에서 완벽한 ‘타자’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와 성령을 조합한 이름을 가지고도, 목사인 아버지를 두고도, 그의 성적 지향 하나 때문에 그는 타자가 되었고 배척당했으며 치료와 교정의 대상처럼 다루어졌다. 아버지가 예성을 죽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런 이념과 기존 삶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예성은 실제로 죽지 않았기에, 그의 아버지가 예성을 죽은 사람으로 여기는 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무서움’에 시달리며 예성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기 이전의 예성이 어떤 아들이었는지 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주체는 타자를 상상할 능력이 없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예성의 아버지는 이전까지 한 번도 현실의 동성애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나름의 원리 안에서 악마화된 모습의 동성애자 이미지를 그려냈고, 그렇기 때문에 예성이라는 구체적이고 가까운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성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예성’이 아닌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아버지는 딸기를 찾아와 자신이 모르는 예성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의 이런 시도는 예성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자기 마음대로 예성을 죽이고 그렇게 살아있는 아들을 죽인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딸기에게 예성이 누구인지, 딸기의 곁에 있던 루카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듣는 것만으로 예성을 다시 살려내려 하는 것은 너무 쉽고도 시혜적이며, 누군가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기득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딸기는 이런 예성 아버지의 발언에 분노하면서도, 자기 자신 역시 루카에게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가족들과 기독교 공동체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예성에게 자신이 내내 소속되어온 공동체 그리고 믿음과 기도는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그는 기독교인이면서 퀴어인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딸기는 이런 루카를 이해하지 못한다. 딸기는 자신이 루카의 사회에 유일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딸기의 사회에서 유일한 시민은 루카이기 때문에. 하지만 루카라는 한 사람 속에서 가족, 친구, 지인, 더 나은 삶을 모두 찾고 구한 딸기의 선택은 옳은 것일까. 루카에게는 가족이 필요했고, 교회가 필요했고 딸기가 없는 다른 삶도 필요했다. 딸기는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루카가 교회에 간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루카가 자신을 떠나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딸기는 자신의 연인 루카가 가진 모든 부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루카 역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한 사람의 모든 부분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당연함을 인정해야 했으나, 딸기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런 불일치를 통해 루카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원리에서뿐만 아니라 딸기와의 관계에서도 타자가 된다. 딸기의 사회에서 단 하나뿐인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은, 루카가 딸기를 단 한 명의 시민으로 받아들인 채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지만 루카는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딸기가 루카의 어떤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루카 역시 딸기의 어떤 부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딸기는 이런 이해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부분’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고 결국 루카와 딸기의 관계는 시들어갔다.

  아버지와 딸기는 공통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지켰고 각자 사랑하는 아들 예성이와 연인 루카를 잃었다. 아버지는 종교를, 딸기는 자신의 사랑과 삶을 믿었고 그 둘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보는 ‘너’의 모습이 ‘너’의 전부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예성이라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너’라는 인물이 벗어날 때 불안을 느꼈고 딸기는 루카라는 이름의,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에서 ‘너’가 벗어나려고 할 때 불안을 느꼈다. 아버지는 결국 신에 대한 믿음을 깨고 자신이 모르는 예성에게 한 걸음 다가가려 한다. 한편 딸기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루카를 잃었다. 아버지와 딸기가 믿음을 버리거나 지킨 것에 대해 옳다 그르다 평가할 수 있을까. 윤리가 지향하는,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이다. 지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완전히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딸기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아버지와 딸기가 가진 기존의 지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던 ‘너’는 존재 자체로 아버지와 딸기의 삶에 하나의 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딸기는 루카에게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라고 묻는다. 하지만 루카의 대답은 들을 수 없다. 루카는 이 소설에서 시점을 부여받지 않은, 빈 공간으로 남겨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 이는 ‘너’라는 인물이 거대담론에 목소리를 빼앗긴 서발턴임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너’는 오직 타자에 의해 명명되고 설명되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된다. ‘루카’로서의 ‘너’의 목소리가 등장하지 않음에도 이 소설의 제목이 「루카」인 이유는 중심이 되는 화자가 딸기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요 화자로 등장했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예성」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가 주요 화자로 등장하게 된다면, 타자가 아닌 주체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어떻게 바뀔까. ‘너’는 루카, 예성 그리고 또 어떤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명명하게 될까. 무수한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소설 속에서 ‘너’의 빈자리는 그저 빈 것으로 남겨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든 ‘너’ 스스로 그 자리에,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이름을 채워 넣을 수 있도록 그저 빈 공간으로 말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