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등을 떠밀어 주는 바람 같다.
mood 2022/02/28 22:40
mood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전자책] 럭키 드로우
- 드로우앤드류
- 11,200원 (
560) - 2022-01-25
: 917
작년 9월, 10년을 다녔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잘린 다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퇴사를 마음먹고 있던 내게 실업급여라는 꿀 같은 기회를 준 대표에겐 일견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퇴사를 한 달 앞둔 나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퇴사일만을 기다렸다. 퇴사하고 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잔뜩 리스트업하고, 그때를 위해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새벽에 일어나 운동도 했다. 고3때보다 이르게 기상해서 늦게 잠들었다. 10년 치의 일을 인수인계하기 위해 수많은 서식을 만들고 정리하면서도 나는 꽤 신이 나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 온 퇴사를 맞이한 다음 날. 나는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한 하루를 보냈다. 나를 설레게 하던 계획도, 가 보고 싶었던 전시회도, 크림과 과일로 장식된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도 흥미에서 멀어졌다.
혼자 일본 여행을 하다가 낯선 도심지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때처럼, 나는 자리에 주저앉지도, 똑바른 방향으로 걸어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정체되어 있었다.
갈 수 있는 길은 너무 많은데, 그 어느 곳도 나의 목적지에 닿아 있지 않을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여행객들의 뒤를 따라 걸었던 그때처럼 남의 이정표를 따라 낯선 곳에 도착해 있다.
하지만 그게 도착이 아니라 불시착에 가깝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은 물고기로 가득한 강의 하류 입구쯤에서 더 이상 떠내려가지 않지 위해 발버둥치게 됐다. 퇴사와 입사, 나의 작은 역사가 반복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 때에 읽은 책들 가운데, 이 책은 나에게 가장 긍정적인 위로를 건네주었다. 내가 왜 이곳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발걸음이 왜 도착이 아니라 불시착이었는지를 상냥하고 자세하게 알려준다.
내가 좋아하는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시간과 사회가 강요한 나의 경제적 가치를 좇았던 선택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을 아늑한 보금자리가 아니라 크레이터 속의 폐허로 만들었다.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현명해 보일 법한 선택을 반복해 도달한 곳에서 나는 또다시 무료함과 싸우고 있다는 신랄한 진실을 조곤조곤하게 말해 준다.
그리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도.
지금까지의 내가 당겼던 것은 남이 베팅한 레버였다고. 이제 내 앞에 나의 무언가를 걸고 레버를 당길 차례라고.
겨우 방향을 잡고 돛을 편 나에게 앤드류의 자상한 지침은 마치 등을 떠밀어주는 잔잔한 바람 같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내 돛이 완전히 펼쳐져서 바람을 타고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물살을 거슬러 달려갈 날을.
나의 의지로, 나를 위해 내가 선택할 레버를 당길 순간을.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