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인간은 그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명령에 충실한 인간이다.
타인의 허락을 거부하려면 나의 명령이 그 만큼의 명분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의 명령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권위와 구속력을 갖고 있는가?
나의 명령은 오직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나를 지배할 수 있는 권위는 ‘이성’이다.
여기서 ‘이성’이라 함은 합리적인 사고로서의 도구나 수단적 의미를 넘어서며
오직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인간과 그 외를 구분 짓는 것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오직 목적 자체인 존재로 격상한다.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에 복무하지 않고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
이성은 인간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세계를 보는 눈이자
판단하는 기준인 것이다.
이런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자유로운 인간이란 누구도 아닌 오직 ‘나’만이
다른 것도 아닌 오직 ‘이성’이 내린 명령에만 복종하는 인간이다.
이성이 내린 명령이란 자율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부여한 법칙,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을 단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는 ‘정언명령’이다.
철학적 이성은 물리와 경험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인 개념의 세계다.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이성이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저 공허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런 이성을 논하는 것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관념을 기준으로
인간의 위치를 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성을 버린다면 우리에게 남는 건 진화론에 입각한
생물학적 존재로서 그저 뇌과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극에 반응하고 환경에 대응하는 고등 생물로서
계속 진행되는 뇌의 구조와 역할의 연구 결과에 따라
그 정의를 계속 바꾸어야 하는 유동적이고 기계적인 존재가
인간의 정의라면 과학적이라고 박수를 쳐야 할까?
철학적인 정의가 관념적이고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오직 생각만으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불과 몇십 년 앞도 내다보기 힘든 시대다.
미래는 굳이 생각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인공지능과 완전한 자동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존재가 아닌 필요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소수의 생산적인 인간이 운영하는 기계에 의해 운영되는 세계에서
다수의 무용한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먼 과거의 철학을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보다 그때 AI보다 고루한 관념의 철학자 칸트가,
유물론적 냉정한 뇌과학의 진실보다 관념론적 철학에 의지한 인간의 정의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칸트는 미래에 역주행하는 인기를 누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