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해외여행이 삶에서 필수이거나 필수에 가까운 요서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국내 여행파이고 이유는 단순하다. 비행기 값으로 술 사 먹기 위해서. 즉 내게 있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내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술 마시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보단 술에 방점이 찍혀 있어서 해외여행만을 고집하진 않는다.
김민철 작가님은 술이나 여행 스타일에 있어서는 나와 같지만 여행의 중요도는 정반대인 것 같다. 그녀는 여행을 가야 하는데 여행을 갈 수 없기에 기막힌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게 나온 책이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이다. 김민철 작가님은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처음 만났고, 그 책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여행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또 여행에 관련된 책이 나왔으니 어찌 읽어보지 않을 수 있을까(선물 받은 것이다)
그녀가 찾은 방법은 과거에 갔던 여행지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과거의 여행을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인화된 사진을 보며 그때가 좋았지라며 잠시 즐거워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회상일뿐이다.
김민철 작가님이 원하는 것은 정말로 여행을 떠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상상의 여행을 간다. 과거의 여행지로 여행을 갔다고 상상하고 그 여행지를 다시 느끼기 위해 그녀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 여행을 떠난 감각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에게 그 경험을 설명해버리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여행 중 만난 할아버지, 열쇠공, 자기 옛 친구, 이모, 남편 등에게 편지를 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기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 모든 것이 왜 여행에서 중요한지 등등.
내가 편지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상상을 해보고 내가 이 편지를 쓰고 있다고 상상을 해보면, 여행 간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 여행지에서 겪은 일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그 마음이 생겨난다. 이것도 여행자의 마음 중 하나이기에 난 잠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된다.
책의 타이틀인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는 여행을 가지 못한 우리가 여행을 떠난 우리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인듯 싶다. 민철 작가님은 아무래도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여행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이 시간을 건너면 다시 여행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을 건네며 이 책을 통해 우리를 잠시 여행지로 떠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한 여행지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거기서 느낀 것들을 여행자의 모습을 고찰하고, 자신의 변화, 환경 문제, 소수자에 대한 문제로 까지 연결시키는 모습에서 진정한 여행의 가치까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은 '술을 마셔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리스트 이기도 하다. 브라보.
하지만 아름다움이 언제부터 고정되어 있던가요.- P24
여행자는 우연을 운명으로 바꾸는 사람이죠- P25
목적지가 없었지만, 바다가 보인다면 순식간에 목적지는 바다가 되지.- P32
병뚜껑이 습관이 아니라, 당신이 습관이 된 거야.
파도가 계속 밀려오듯이 당신 생각이 자꾸 밀려와서 발목을 적셔.- P37
이 결정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네요. 어떤 것에도 정박하지 않는 , 매 순간 낯선 지명을 향해 돛을 펴는 여행자의 망므이라고 설명할 수밖에요.- P41
여행자인 주제에 여행자들이 많은 곳은 피하는 이 고집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걸까요?- P43
결국 저는 여행자의 본분을 택하기로 했어요. 약간이라도 익숙한 것들을 뒤로하고, 낯선 것들 사이를 헤매기로 했어요.- P46
경험한 적도 없는 보뉴의 모든 순간들이 이미 그립거든요.- P47
효율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에서 막 건너온 나는 그 광대하고도 찬란한 빛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던 기억이 나.- P56
물론 그 순간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도대체 어떤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입을 다물게 되지. 하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의 별은 아무나 훔쳐 갈 수 없어. 그 별은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너만의 별.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P58
이런 골목 안에 나를 떨어뜨려놓으면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가 되는 거. 길을 잃어버리기.- P61
더 빨리 가고 싶어도 속도를 조절하며 또 멈춰 서야 해. 더 가고 싶어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멈춰 서야 해.- P65
이 모든 것을 만나기 위해 나는 기어이 여기까지 온거야.- P66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행복의 연금술이 이미 내게 있는데. 어디서든 순식간에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P67
마법같은 일이 우리에겐 일어나는 법이죠. 여행 중에는 좀 더 자주 일어나고요. 우리가 여행자의 영혼을 데리고 다니니 말이에요. 기꺼이 탄복하고, 사소한 물음도 오래 곱씹고, 매 순간 진심인 여행자의 영혼 말이에요.- P94
추천과 선물의 공통점이 있죠. 둘 다 상대의 마음에 꼭 맞길 원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잇다는 것. 다만 선물은 오롯이 상대의 취향만을 생각하면 되죠....(중략)
근데 추천은 좀 이야기가 다르죠. 내게 좋았던 것 중 상대에 마음에 꼭 맞는 것을 골라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잖아요.- P101
그 여행을, 좋았던 순간을, 해맸던 순간을, 좀 돌아가고도 싶었고, 좀 더 오래 머물고도 싶었던 그 순간을 작은 기념품에 담고 싶으니가. 절박하게 기억의 한구석을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 바꿔서 가지고 싶으니까.- P120
딱 소화하기 좋을 정도로 작고 가벼운 사고. 여행자의 이 간사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P174
사람이 희미해져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어던 부분도 남아 있지 않은 무채색의 존재가 거기 서 있더라고요.- P181
구체적인 행복을 열망할수록 가난해지는 기분.- P182
한 도시의 영혼은 어디 한 곳에 고정되지 않는 법이라고, 당신 영혼에 꼭 맞는 이 도시의 영혼을 찾아보라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P183
매순간 이 여행이 내 마음에 꼭 들도록 만드는 것을 나의 유일한 목표로 삼으며 여행하고 있어.- P226
움직이는 여행자의 몸속에 이토록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라니.- P228
나에게 공항은 거대한 불확실성의 세계, 원치 않는 우연이 자꾸 개입하는 세계, 빨리 통과하고 싶은 세계에 불과해
..(중략)...
희박한 시나리오들이 그 짧은 순간에도 끝없이 반복돼. 그러다가 결국 여행 떠나온 걸 자책하는 순간까지 있다니까.- P248
여행자 김민철은 내 여행의 범위를 자꾸만 고민하는 사람이네요.
...(중략)...
고민 없는 사람보단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낫겠죠. 심지어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온몸으로 던져준 고민이라면 나도 그 고민을 정면에서 온몸으로 받아야 마땅하겠지.- P261
근데 그거 아세요? 기억하려고 애쓸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들은 다른 것들이었어요.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사람들...
(중략)
‘정상‘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집착. 조금만 달라도 ‘정상‘이 아니죠.- P271
목소리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목소리를 낼 땐, 귀 기울여야 하죠.- P282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사람의 부드러운 위로가 아니라 거칠고 명징한 바다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걸. 아무도 없는 겨울 해운대라면 그런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걸.- P284
마음이 이미 바닷가에 도착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몸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재빨리 마음을 따라잡으러 달려 나갈 수밖에- P291
과장법이 심하다고요? 여행자잖아요. 과장법은 여행자의 특권인걸요.- P292
고치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어쩌면 오래도록 제자리걸음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하죠.- P298
제 곁의 양지를 조금 넓혀봐야겠어요. 그곳에 어떤 씨가 싹을 틔울지 알지 못하잖아요.- P299
공항 밖으로 나서면 갑자기 무대 조명이 꺼지고 관객석에 형광등이 켜진 것 같은 그 돌연한 환기-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