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인 모드 쥘리앵은 완벽한 아이를 만들어 내겠다는 아버지의 망상과 폭력 속에서 집에 갇혀 살게 된다.
악기를 배우는 이유는 수용소에 잡혀갔을 때 악기 연주하는 이들은 살 수 있어서이다. 부드러운 고기를 위해 그녀는 살아있는 송아지를 안정시켜야 하고 그 송아지가 도축되는 것을 보고 살덩어리들을 날라야 한다. 캄캄한 지하실에서 죽음을 명상해야 한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작가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면, 그 기억 때문에 십수 년을 고통 속에 살고,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내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는 것을 몰랐다면 난 이 내용을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토록 참혹한 정서적 지배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어린아이가 그런 환경에서도 버티며 살아오고 그러한 피해를 받은 이들을 돕는 직업을 선택할 정도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운동선수들의 폭행 문제나 군대에서 말도 안 되는 폭력이 가능한 이유는 그곳이 갇힌 세계이기 때문이다. 갇힌 세계에서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 구성원이 살아가려면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거기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아이는 도대체 이 희망을 어디서 찾아낸 것이란 말일까.
그녀는 네발의 동반자들과 책 속의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음악들과 대화했다. 개 한 마리, 조랑말 둘, 그리고 오리로부터 사랑을 느꼈고, 몽테크리스토 백작, 변신, 파리의 신비, 지하로부터의 수기, 오디세이아..같은 책을 읽으며 세상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대화했다.
그렇게 좌절하지 않은 그녀는 운명이 그녀에게 몰랭 선생님이라는 구세주를 보냈을 때, 그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냈다.
탈출에 성공하고 나서 겪은 후유증 역시 책으로 탈출한다. 책을 통해 '삶의 수단'을 익히고 인문학 등 여러 접근법을 접목한 심리학 서적을 읽으며 치료에 성공했다.
어린아이가 암흑에서 책을 동아줄 삼아 버티며 탈출했던 이야기를 보았으니, 다음은 성인이 책에 대한 기억을 동아줄 삼아 버티고 살아남은 이야기인 유제프 차프스키의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를 읽어보아야겠다.
만약 나에게 운명이 보낸 구세주의 손을 잡아야할 때가 발생한다면, 그의 손을 잡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
48. 나는 선생님의 딸이 '선택'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선택이라니, 하라면 그냥 하는 것 아닌가?
70. 말을 금지하는 벌은 생각보다 훨씬 힘겹다. / 내가 죽음의 유횩에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텅빈 침묵 앞에서 찾은 놀라운 위안, 동물들과의 대화 덕분이다. / 음악도 대화를 한다.
83. 동물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르쳐주기도 하는 걸까?
85. 고르는 건 즐거움이 아니다. 나약한 자들만이 고르느라 망설이고, 그렇게 즐거움을 찾는다. 인생은 오락이 아니라 가차없는 전투임을 잊지 말거라
86. 도대체 아버지는 왜 계속 나를 의심할까? 나는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트리를 꿈꿔본 적이 없는데
92. 서로를 바라보는 게 우리에게는 너무 낯선 일이다.
128. "넌 겁쟁이야! 비겁해! 평생 제대로 된 일 하나도 못하고 말 거야!" / 내가 스스로의 비겁함 앞에서 느끼는 그 압도적인 경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132. 아버지의 가르침은 늘 이렇게 끝난다. "우리집 철책 담 밖은 암흑에 빠진 동굴이다. 너는 집 안에서 내가 가져다누는 빛과 자유를 누릴 수 있지. 넥 얼마나 운이 좋은지 기억하거라!"
137. 나는 그레고르다. 하지만 따라가야할 모델을, 본보기를, 이상을 찾았다. 당테스가 나에게 자유의 길을 보여준다.
141. 설사 그것이 쓰레기라 해도, 내 바이 커튼 안감에 정성스레 숨겨둔 나의 소중한 물건들의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 그것은 예기치 않게 찾아왔기에 마치 마법과도 같았던, 경이로웠던 탈출의 도취를 환기시켜준다.
159. 아버지가 우리를 가두어놓은 이 세상 전부가 사실은 탁월한 통찰력이 아니라 은밀한 고통에서 나온 게 아닐까? / 도망쳐
173. 이제는 가구와 물건과 책을 모두 다른 자리로 옮겨 놓고 싶다. 일과표의 일정들도 마음껏 바꾸고 싶다. 마침내 가능한 변화의 문이 열린 듯한 기분이다.
194. 망설임 끝에 나는 지극히 사소한 한 가지 규칙을 어겨보기로 한다.
212. 페리소가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마다, 그 눈이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왜?" / 페리소의 '왜?'가 지금껏 내 머릿속에 맴돌던 모든 '왜?'들과 하나가 되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214.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다.
217. 아니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바보 취급하며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하게 된다.
253. 책에서 읽는 이야기들이 나를 물들이는 걸까?
261. 다행히도 음악과 독서가 내 마음을 달래준다.
293. 집 밖에 한번 나가본 뒤로 나는 마치 마약을 처음 맛본 사람처럼 죽을 듯한 갈증을 느낀다.
310.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벌써 아버지가 그립다. 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서 도망치고 싶다.
312. 나는 경이로울 만큼 행복하다 / 내가 있는 곳은 수용소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연주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다른 연주자들,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함께 흥에 젖기 위해 연주한다. / 나는 내 부모의 집을 나왔다. 정말로 나왔다.
313. "언젠가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하리라."
315. 하지만 한참이 지난 뒤, 내 안에 남아 있던 두려움들이 결국 나를 장악해버렸다. 더이상 유년기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19. 그 책들을 읽는 시간이 나에게는 진정한 치료였다.
322. 하지만 나는 결국 자유의 길을 찾아냈다. 우선 나에게는 생명 넷으로부터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개 한 마리, 조랑말 둘, 그리고 오리다. 나에게 우정을 베풀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323. 그렇게 운명이 나에게 구세주를 보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334. 과거에 갇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필사적으로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 모드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럴 용기가 솟는다.
339. 그 속에서 살아온 아이에게는 그런 아버지도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이ㅏㄷ. 그래서 어린 모드는 아버지를 수치스러워하고 증오하면서 동시에 그 수치심과 증오심에 죄의식을 느낀다.
340. 모드가 딸을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망상과 폭력의 희생자였다면, 자닌의 감정의 밑바닥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유년기의 슬픔이 자리잡고 있었을 테고 / 어린이 된 자닌은 나쁜 엄마이지만, 사실상 그녀는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아이다.
341. 모드 쥘리앵이 이 책에 "식인귀의 첫 희생자였던 나의 어머니에게"라는 헌사를 붙인 것은 끝내 포식자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를 향한 아마도 불가능할 화해의 기원이었을 터다.
342. 모든 슬픔은 이야기될 수 있을 때 견딜 수 있다는 유명한 말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있던 고통을 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가장 깊이 화해하는 방법이고, 그것을 책으로 내어놓는 것은 그동안 온전히 안에 들어가 머물 수 없었던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