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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ylotus님의 서재

항상 거대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던 나에게 아담한 크기의 동네 도서관이 마음에 들리는 없었다. 시무룩한 마음으로 대출증을 만들었고, 그렇게 처음으로 대출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몇 명이나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데, 책은 참으로 깨끗했다. 확실히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이 죽어가나 보다. 시름시름 앓는 그 소리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 한 권의 책을 만나기 위해 내 마음은 그토록 떨려야만 했나 보다. 한 권의 책 속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많은 책 이야기는 내게 축복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음으로써 그 책을 다 읽은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듯, 난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너무도 많은 책을 읽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호흡이 가빠왔고, 배가 불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쪽 구석이 사늘하니 아려왔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난 부족함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서로 다른 책을 골라 읽고, 또 서로 다른 것들을 느낀다. 나는 책이 좋았고, 책을 읽는 순간에도, 읽고 나서도 그저 좋아 앓아댈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책이 좋다 못해 그 책을 무기로 사용하겠단다. 미움을 불러 일으키는 이들을 향해 던지는 책이라니, 물론 운이 나빠 모서리에 맞아 죽는 경우도 생길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무기 치곤 너무 부실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그들에게 책은 핵폭탄 보다 더 무서운 무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책은 그저 개별적인 문자의 집합이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고, 일상을 분해하는 날카로움이었다. 그 날카로움에 잠시 찔려 아픔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 아픔은 실로 에로틱했다. 갑자기 왠 야시시한 분위기냐고? 타인의 속을 훔쳐보는 것만큼 야릇한 경험도 없지 않은가? 책 속에 갇혀버린 책들은 저마다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나를 여기서 꺼내 달라는 그 목소리가 참으로 짓궂게 들려왔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유치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나 잡아 봐라’를 외치면서 나를 약올리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난 그렇게 그들이 벌려 놓은 축제의 한 가운데까지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그 축제는 실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언젠가 읽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너무 어렵다며 어디론가 던져버렸던 불청객들이 쏟아내는 소리는 실로 왁자지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모두 세상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전혀 다른 언어,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퍼즐 조각 맞추듯 맞추어 나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읽고 싶다’ 혹은 ‘읽어야만 되겠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내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켁..켁.. 숨 막힌단 말이지, 그만 나 좀 놓아주는 게 어때?’

‘니 삶은 모순 덩어리였어. 넌 좀 더 당해야해.’

악독하기 그지없는 녀석들과 한바탕 뒹굴었고, 그러면서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는 그 순간에도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썼던 내 부조화스러운 모습이라니. 그래, 난 너무도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장자도 아닌 것이 ‘나, 이번 생은 포기한다. 다음 생에 다시 승부하련다.’ 라면서 막무가내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이란 실로 코미디였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무의식적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수유’. 젠장… ‘수유연구실’ 이라는 단어를 하도 열심히 읇어댔더니 이런 실수를… 그래, 책과 만나려면 이 정도야… 투덜 투덜…

북적 북적.. 머릿속에서 책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글 쓰고 싶다며 마구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멋대로 움직이는 몸들을 향해 난 외치고 있었다. ‘이봐! 난 천재가 아니란 말이지… 천천히… 기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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