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shinylotus님의 서재

 가을 빛에 알맞게 익은 남해의 바다는 여름철보다 더 파랗다.산녘의 단풍이 서로의 붉음을 질투한다면 바다의 단풍(?)은 푸름을 경쟁한다.나는 늘 관찰자로서만 그 바다를 바라본다.남해의 바다는 수많은 어촌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흰 점처럼 알알이 박혀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베를 가르듯 푸른 물결을 가르며 섬과 섬 사이를 달리는 통통배,어구를 손질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련하다.멀리 죽방렴도 보인다.사릿대를 얽은 죽방렴은 남해에만 있는 전통 멸치잡이 어구이다.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처럼 석양을 받은 죽방렴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거제-통영-남해....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바다가 아름답다고 일컫어지는 곳이다.하지만 지금 바다는 수백년전 붉은 피의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진 않는다.그저 아름답고 아름다울 뿐이다.혹시 모른다.바닷가를 걸으며 들을 수 있는 썰물의 소리,자갈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오래전 그들의 울음을 바다밑에서 끌어올리고 있는지도...  현실의 우리에게 수백년전의 칼소리를 기억나게 해주는 것은 남해일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승첩비들이다.이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고속버스 휴게소 처럼 관광버스가 몇대 정차해 있는 곳들이 있다.대개 그곳이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승전비가 있는 곳이다.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장군과 관련된 어떠한 흔적이라도 있는 곳이다.나는 대개 그런 곳들을 그냥 지나친다.그저 지나가면서 '아...이 곳이 노량이구나' '아...이 곳이 명량이구나' 한다.

<도모유키>를 읽었던 시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린 때였다. 막대한 물량과 화려한 전투씬,예전 이순신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성웅의 인간적 고뇌등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제작 초기에 드라마의 역사성을 가지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역사 드라마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가야하는 딜레마였다.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않고 역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왜곡이고 분개할 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일뿐이다.굳이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성에 깊이 천착하려들면 아마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는 TV정치 뉴스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그리고 역사성을 운운하며 비판하던 사람들 역시 지루하다며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도모유키>의 배경은 드라마의 끝부분에 닿아 있다.조선 수군의 봉쇄와 육군의 선전으로 재침입한 일본군은 순천성에 고립된다.주인공 도모유키는 고립된 일본군의 군막장 중 하나이다.그는 침략군 군인이나 또한 하나의 개인이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건을 인식할 때  조직이나 국가 단위로 큰 범주화 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사실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또한 그 안에 오류가 있다 손 치더라고 범주의 광범위함이 가진 작은 예외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되기 때문에 빠져나가기도 좋다.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대범주가 가진 섬세함의 부족에 대해선 끝도 없는 예가 있다. '일본놈들은 하여간 약다니까' '미국 놈들은 지들이 제일 잘난지 알지''한국놈들은 하여간 맞아야돼'' 전라도 놈들은 으뭉해서 절대 믿으면 안돼'...등등등

이러한 일상언어의 개인에 대한 부정과 몰이해는 뜻밖의 편견을 가져다 준다.내가 아는 어떤 전라도 친구는 진짜 으뭉스럽다.또 어떤 전라도 친구는 오히려 쿨하다.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은 약다기보다 예의바르고 깔끔하고 어떤 미국인은 누구보다 부시에 반대하며 미국의 반성을 촉구한다. 일상 언어가 가진 폭력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소멸'이다.특히 전쟁이란 상황에 놓여 모든게 극과 극으로 구분된 때라며 이 개인을 향한 폭력은 물리적 형태를 동반하여 의식 기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전쟁 상황이 되면 적 아니면 아군이다.그러다 보니까 묻혀버려야하는 기억들이 있다.개인의 역사이고 그들이 가진 모든 질곡들이다.

주인공 도모유키를 통해 나는 드라마 이순신을 보며 거북선에 부딪혀 바다로 떨어지는 일본군 스턴트맨을 생각했다.실제 스턴트맨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얼굴한번 보이지 않지만 위험천만한 연기를 묵묵히해내야 하는 스턴트맨들.그들은 거기서 받은 수당으로 소주 한잔을 기울이고 또 작은 아들 자전거를 한대 사주었을 것이다.다음으로 그 스턴트맨이 연기한 수백년전 거북선에 받혀 떨어진 진짜 일본군에 대해 생각한다.주인공 도모유키처럼 여동생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소망을 가진 병사였을 수 도 있다.아니면 늙은 노모와 부인을 두고 끌려와서 어쨋든 살아돌아가고픈 마음 밖에 없는 병사였을 수도 있다.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개인사의 질곡을 담고 있는 일본군 병사-왜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돌아가지 못했고 그들의 역사는 아무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성웅 이순신의 영웅적 행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조선 침략 선봉장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의 이름 역시 그 가문의 명예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 수군 돌이,봉이,먹쇠,일본 육군 도모유키,기요시,나가타 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번 당파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지도자의 뛰어남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않된다.하지만 나와 같은 민중은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잡초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고 당파적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박정희가 근대화에 어느정도 기여했고 그의 카리스마 역시 개발드라이브에 힘을 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하지만 나처럼 고위층에서 먼 사람은 그들의 공로보다 동일방직 여공과 YH여공과 동대문시장 피혁노조원들이 경제개발을 만들어 냈다고 믿어야 한다.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또한 집단 속에 묻혀버리는 개인의 삶에 대해 당파적 애정을 보낼 수 밖에 없다.대학 다닐때 많이 들었던 '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 개인은 접어라' 라는 뉘앙스의 말이 비록 정치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나의 당파성은  개인들이 가진 수많은 사연들에 대한 배려쪽으로 기울수 밖에 없다.언젠가 지리산 산청에 가서 어느 촌로와 한참을 이야기한적이 있다.그 동네는 지리산 대원사 밑자락 동네로  한국전쟁당시 아침에 국군,저녁에 빨치산 하던 곳이다.그 촌로의 일가친척,친구들이 죽고 살고 당하고 모면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전부 다 소설이다.어떻게 살아서 나랑 이야기하나 싶은 정도다.그 촌로가 내가 싫어하는 '한나라당'에 투표했다고 그를 의식없는 노인네라고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가 박정희 예찬론자라 하더라고 나는 쉽사리 그를 욕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설령 정치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믿을 지라도

도모유키는 국가와 민족을 떠난 개인이다.낭만적 개인이며 인간적인 개인이다.전쟁이란 상황에선 이런 가치가 자신의 목숨을 앞당길 수도 있다.어떤 맹목적인 개인은 그래서 위에서 시키면 명령이라고 다 한다.민간인 학살같은 것도 전쟁시 명령이었으므로 난 책임없다고 당당하다.일개 병사가 무슨 큰 죄가 있겠냐만은 개인에게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인류의 양심이란 잣대에 기대어 보면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흔히들 '친일청산 식민잔재 청산'을 말한다. 비록 늦었지만 친일인사 명단도 공개돼었다.하자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에 대해 '우월감'과 '피해의식'이라는 두가지 감정 상태에 혼란을 겪고 있다.매일 TV에서는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다고 떠벌이며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또 한편에선 과격한 민족주의로 '피해의식'의 발로를 애국이라 믿고 있는 세력도 많다.일본어투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상품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을 배워 이기는 것만이 친일청산일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 우리사회에 남긴 '전체주의''집단주의'를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 아닐까 한다.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개성,역사가 말살되어 집단으로 귀속되는 한국사회의 특성 역시 그 근대적 시원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 수많은 도모유키가 살아나야 한다.수많은 봉자,말숙이 살아나야 하 듯이......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