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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지루하다는데 나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았다.몇자 안되는 글의 함축성이 좋았다.그 깊이를 다 알수는 없으나 넘겨짚은 이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거기에 어디가서 몇자 읊어주면 그럴싸 하게 보였다.대학들어가면서 당연히 그쪽 관련 수업을 찾아들었다.그래봤자 결국 교양수업 몇개 일 뿐이니 고전에 대한 나의 이해가  남들 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는 없다. 대학가서 웃겼던 건 비슷한 고전강독을 서너차례들었다는 것이다.지금 그 강의 명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대개 <동양 사상의 이해> <동양문화사><중국 정치의 이해> 뭐 이런 것들이었다.그런데 이 강의가 전부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커리큘럼으로 짜여진 수업들이었다.<동양사상의 이해>야 그렇다 치자.이름이 그럴싸 해서 들었던 <동양문화사>강의. 첫 시간 교수님은 "동양문화의 핵심은 중국이다.그리고 중국 사상의 근원이 형성된 곳은 춘추전국 시대 즉 제자백가의 시대이다."이런 말로 한 학기 강의의 개괄을 하셨다.그리고 한한기 동안 신영복 교수 <강의>의 목차와 유사한 수업이 진행되었다.더 웃긴건 <중국 정치의 이해>였다.나는 처음에 문화대혁명,모택동,주은래,등소평 ...뭐 이런 거 나오는지 알고 수업신청했다.그런데 왠 걸.또 첫 수업시간에 강사는 "이 강의는 사마천의 <사기>가 텍스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그리고 한 학기 동안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만 한참 했다.당연히 논어,맹자,한비자 이야기가 빠질리 없다.중간 고사는 서울대 출판부에서 나온 한자 많이 쓰여있는 <사기 열전> 독후감이었다.결국 비슷 비슷한 강의를 세차례나 들었던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것과 땡땡이가 많았다는 것.제대로 배웠다면 훨씬 좋은 리뷰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을.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학문적 깊이와 개인적 경험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품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분이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벅찬 감동과 충격은 아직도 남아있다.뿌연 안개같은 실타래를 시퍼런 칼로 두동강 내는 느낌이었다.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또한 다시금 풀무질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해주었던 글이다. 이 책 <강의>에서도 신영복 교수의 선명함은 드러난다.실천을 가장 우선시 하는 그의 현실적 세계관과 변혁을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 돋보인다.그는 단순한 어구풀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그는 동양 고전을 우리의 현실과 새로 만들어야 할 세계에 이입 시킨다.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고전,바로 이책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 하나 따로 짚어 말할 바는 아닌 듯 하다. 동양 고전을 읽는 신영복 교수의 독법에 대한 부분이 더욱 중요하다.이 책은 단순한 강독이 아니기 때문이다.책 서문에서 신영복 교수는 분명히 자신의 독법을 밝히고 있다.그것은 '관계론'이다. 신 교수는 유가,도가,법가등 이곳에 등장하는 사상의 한 구절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강조한다.'관계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존재론'이다.신영복 교수는 유럽 근대사의 구성원리가 '존재론'에 있다고 밝힌다.즉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고 그 개별 존재들이 사회안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합리와 이성에 기댄다는 것이다.반면 동양 사상의 근원은 '관계론'으로 규정한다.동양사상의 근원이 되는 고전들은 공통되게 인간성 함양을 목표로 하고 있다.또한 나와 타인,나와 자연,나와 사회라는 관계망을 대전제로 하는 철학인것이다.주역의 효를 예로 들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효는 득위해야 좋은 것입니다.양효라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거나 항상 양의 성질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주역 이외에도 저자는 논어,맹자,노자 그리고 불교의 연기론까지 거론하며 모든 것이 '망'이라는 관계를 다루고 있고 그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관계론'에 대해 저자가 중요시하는 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가장 큰 문제 제기는 상품자본주의 사회에 있다고 하겠다.대개 소비자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비해 저자는 상품자본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이 상품 자본주의는 서구식 근대화를 의미한다.저자는 '관계론'이라는 동양의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구 자본주의 근대화의 폐해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대개의 리뷰어들과 서평들이 신영복 교수의 글에 대해 딴지를 걸지 않고 있다.글의 내용과 그의 알려진 인품을 고려하면 쉽사리 딴지걸기가 쉽지 않다.나 역시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굳이 비판적으로 보고 싶진 않다.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꼬투리 잡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사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조금 다른 부분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보는게 나을성 싶다.

 

우선 언제가도 한번 말했지만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 '관계론'강화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우리사회는 관계의 그물망이  지나치게 촘촘하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신교수가 말하는 관계성의 인식과는 다른 차원일 것이다.그가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자연과 인간,인간과 인간의 거시적이고 형이상학적 관계성에 대한 이해를 뜻한다.그것이 속도와 소비로 집약되는 현대의 자본주의 폐해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관계성의 회복을 통한 소외의 극복이라 볼 수 있다하지만 문제는 그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어떠한 형태로 변형되는 가를 살피는 것이 또한 땅에서 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우리 사회는 의식적인 면에서 전근대적 양상을 많이 따르고 있다.굳이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단 전근대적 보수성이 관계망의 형태를 띠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신영복 교수는 현재 우리사회의 개인들이 분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맞는 말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가장 분자화 되어있다고 보는 젊은 층을 예로 들어보자.그들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대개는 보수적 가부장제 하에 종속화 되어 있다.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의식의 전근대성은 여전하다.가족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가 그들 분자화되어 있는 개인에게도 내재화 되어있다.또한 사회를 나가보자.탁 까놓고 이야기해서 지방대 출신으로 아무리 능력좋아도 대기업 사장되기 힘들다.여러가지 기회의 차별도 있겠으나 우선 학연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그 학연이라는 것은 무었인가.관계망이다.부정적인 관계망이며 망국의 네트워크이다.그런데 그 내부에서는 상호이익이라는 원만한 인간관계가 형성된다.앞서서도 말했지만 신영복 교수의 관계망이 이러한 부정적인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늘 낙관적인 미래를 말하고 희망을 전파하기에 이러한 변질은 나의 우려이자 노파심일 수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개인은 약하고 집단은 힘이 세다.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회의 개인은 혼자 있으면 다 바보가 된다.그러다가도 몇몇이 모이면 목소리가 커진다.우리 몇만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게 없다는 식이 된다.통속적인 예는 길거리에서도 볼수 있다.조금 확대하면 이는 집단주의 정서와 곧바로 연결된다.신교수의 네트워크가 늘 낙관적인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그것은 폐쇄적 집단주의 성향을 띤 관계망으로 발전되는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묵자의 예를 들어보자.이 책에서 묵가는 겸애와 반전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공동체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거기에 계급적으로도 하층계급이 주를 이루었기에 괜히 민중적으로 보인다.그래서 그런지 어떤 분들은 묵가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묵가의 진보적 속성이 현재 벌어지는 우리사회의 이슈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몇몇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다.

(묵가는) 실천의지를 추동하기 위한 장치로서 귀와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강고한 조직과 엄격한 규율을 가진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묵가는 방어전을 펴기 위해 축성을 하고 방성기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이에 부적을 써서 그걸 가지고 적을 이길 수도 있다고 믿었다.귀신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일부에서는 묵가를 일종의 사교집단으로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이것은 당대에도 비주류였고 유가전통에서도 어긋나기 때문에 후대가 탈색시킨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다.그리고 그 시대적 상황에서 부적이니 귀신이니 하는게 가능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한다.동학 또한 그러한 신비주의가 있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개인의 의지는 철저히 배재된 집단자살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살길이 있었으나 거자의 신념을 위해 묵가의 민중들은 생사여탈권 마저 넘긴 상태가 된 것이다.옛날에는 의를 지키기 위해 다 그랬다고 말할 수 있을까.지금보다 신념과 가치가 존중받았던 시대였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다.즉 이러한 비판도 현시대적 관점이라는 것이다.하지만 한 개인의 생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묵가의 사상은 분명이 현대에 돌아봐야할 여러 가치들을 제공해준다.하지만 묵가의 이러한 사교적 모습,또는 작은 병영사회적인 모습에 대해 저자는 그다지 알려주지 않는다.묵가라는 집단 관계망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개인의 희생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또한 이 책은  강의의 편의상 그랬겠지만 너무 도식적 구조를 많이 따르고 있다.즉 이분법을 피한다고 하면서도< 서구=존재론=상품자본주의=부정의 대상/ 동양=관계론=화동의 사회=복원의 대상> 과 같은 대립구도를 시종일관 사용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이를 당파성으로 설명한다.하지만 강의의 편의상이거나 또는 당파성의 필요에 의해서라 하더라도 이런 이분법적 대립각은 너무 용이한 길을 찾으려는 편의주의적  설명이라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이렇게 딴지를 걸었지만 정당한 비판이라 보기 어려울 수 있다.앞에서도 말했지만 읽으면서 생겼던 몇 몇의 의문과 주관적인 감상을 옮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 더 급박하게 필요한게 무었인가를 두고 내 견해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더 많은 '개인'이 필요하다고 본다.우리사회가 압축근대의 암호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사회 각 영역을 지배하는 것 역시 시스템이라기 보다는 전근대적 불합리성이 너무 많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또한 대다수 개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역시 부정적 관계론의 그림자이지 싹수없는 개인의 존재감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고전이 현대에 요구하는 것이 개인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개인주의의 근원도 이러한 자기성찰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는 관계론이라는 틀(당파성)을 가지고 읽어낸 한 가지의 길일뿐이다.고전의 바다는 넓고도 넓다.퍼담아도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도 한다.나 역시 한바가지 쯤 퍼 담고 싶은 바람은 있다.하지만 아직은 형편없이 부족하다.스스로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날은 올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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