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shinylotus님의 서재
 전출처 : 드팀전 > 20세기 피아니스트-3

6. 알프레드 브렌델(1931∼ )

브렌델이야말로 20세기의 피아니스트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한 존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유난히 개성이 강하고, 신경질적이고, 까다로워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서 그렇다.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자리까지 올라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공기와 같이 원래부터 ‘그저 그냥 있는’ 존재같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다른 연주가들의 떠들썩함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의 연주도 그렇다. 다른 연주가들처럼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색 무미 무취의 연주라 할 수 있다. 다른 요소들을 다 배제하고 ‘남은 것은 그저 음악’인 셈이다. 무엇이 그의 연주를 그렇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를 읽어내는 탁월한 혜안을 가졌다. 따라서 다른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지 않고도 그저 구도를 잡아나가는 것에 의해서만 작품의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표현해 내는 슈베르트와 베토벤은 다른 그 누구의 연주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전혀 노력 없이 직관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신적인 천재’라는 얘기는 아니다. 브렌델 자신이 고백하길 자신은 절대로 신동이 아니었다 한다. 과거 체코 땅이었던 모라비아에서 태어나 17세 되던 1948년 첫 연주회를 열었다. 하지만 그리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에트빈 피셔라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스승으로 둔 것만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독일-오스트리아계의 정통 피아니스트가 될 자질을 전부 그에게서 물려받았다. 1949년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은 그가 기교적인 측면에서 다른 피아니스트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빈에 거주하다 런던으로 옮겨 소리 소문 없이, 하지만 알차고 꾸준히 활동을 전개해온 브렌델. 그는 계속해서 연구하며 저술활동도 펼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의 성실성만은 연주에 아주 쉽게 반영되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한 레코딩을 펼쳐왔다.

이미 그가 필립스에 남긴 녹음들은 상당수가 된다. 베토벤의 소나타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역시 대표적인 레퍼토리.


7.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1920∼1995)

기인적인 생활을 하다 지난 95년, 마침내 우리 곁을 떠난 또 한 사람의 괴팍한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 그는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1939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코르토로부터 ‘리스트의 재래’라 불릴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테크닉과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그는 다재다능하긴 했으나 좀처럼 굽힐 줄 모르는 곧은 성격으로 좌충우돌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생각보다 여리고 섬세한 성격으로 결국 자신이 상처를 받는 결과를 낳았다.

마음에 드는 제자라면 돈 한 푼 안 받고 오히려 생활을 돌봐줘가며 데리고 있던 진정한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 그도 역시 자신의 피아노를 연주에 끌고 다녔고, 별별 기행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고 다녔다. 그의 행적을 보면 ‘저게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하기 그지없다. 카레이서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았던 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에 생포된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기도 했다. 음악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경력 아닌 경력’이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세계무대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그는 조금만 기분이 좋지 않아도 연주회를 취소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자신이 계약했던 음반사의 파산으로 경제적 책임을 지게 되자 조국 이탈리아를 가차없이 떠났고, 이후 이탈리아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소리를 재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레코딩은 극도로 기피했던 그에게 내릴 수 있는 판결은 ‘완벽주의자이자 천재’밖에는 없을 것이다. 미켈란젤리는 가정용도 아닌 콘서트용 피아노를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할 정도로 피아노의 물리적인 특성을 속속들이 잘알고 있었다. 또 피아노를 자신의 몸처럼 다루며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는 제어능력으로 초절적인 기교를 자아냈고, 페달링에도 통달해 있어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마음대로 빚어냈던 마술사이기도 했다. 역시 그런 특성에 딱 들어맞는 레퍼토리가 그가 남긴 가장 훌륭한 음반이다.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발매된 드뷔시의 전주곡 1집과 2집, 영상 1, 2집과 ‘어린이 차지’가 그것. 이 음반을 들으면 드뷔시를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사람도 드뷔시가 미켈란젤리의 몸을 빌려 그리는 ‘인상주의적인 음화(音畵)’의 마력에 빨려들고 만다. TV 방송용으로 녹음된 줄리니 지휘의 빈 심포니와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음반(DG) 중에 3번과, 5번 등도 유명하다.


8.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 )

미켈란젤리에 이어 폴리니와 아르헤리치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폴리니는 미켈란젤리에게 고작 6개월간 배웠으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이자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꼽는다. 아르헤리치도 미켈란젤리에게서 배운 적이 있다. 미켈란젤리는 세상을 떠났고, 폴리니와 아르헤리치도 나름대로의 예술세계를 찾아 비상하고 있는 중이지만, 이들이 후대에 하나의 유파로 묶여 분류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지금 보기엔 이들의 공통점은 예민함밖에는 없어 보이지만. 예술이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얘기는 신비로움을 더하는 면이 있다.

폴리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1960년 쇼팽 콩쿠르에서의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이라는 경력과 함께 거기에 딸린 유명한 일화들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우리 심사위원들 중에 과연 누가 폴리니만큼 연주할 수 있겠는가?’ 하며 감탄했다는 것과, 협주곡이 끝난 후 한 심사위원이 ‘그는 음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폴리니가 콩쿠르 우승 후 곧 바로 잠적했다가 약 10년이 흐른 후에 무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이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는 일설도 있지만, 이는 분명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폴리니는 쇼팽 콩쿠르 우승 후 약 1년간 꽉찬 일정으로 순회 연주회를 가졌고, 다시 1년간은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5년간 많지는 않았지만 규칙적으로 연주회를 열었고,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회 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르헤리치와의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보다 한 해 먼저 태어난 아르헤리치가 1957년 제네바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폴리니는 2위를 차지했다. 다음해 폴리니는 제네바 콩쿠르에 재차 도전해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쇼팽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폴리니가 먼저 따냈다. 다음회인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는 아르헤리치가 우승했다. 이는 두사람이 그 세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연주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주 스타일을 한마디로 잘 깎여진 다이아몬드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만큼 완벽하게 다듬어진 치밀함과 빈틈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김용배는 그의 연주에 대해 ‘기교가 기교로 느껴지지 않는다. 피나는 노력이 전혀 없이 얻어진 듯한, 즉 선천적으로 그저 타고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 엄청난 기교가 그의 몸에 융해되어 있었다’고 평했다.

그런 폴리니가 최근 들어 많이 유해졌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전에는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어 순수한 얼음같이 차가웠던 연주를 들려주던 그가 천부적 기교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면모를 쌓아가는 법을 터득했다는 얘기다.

그의 음반으로 손꼽히는 것은 역시 쇼팽의 녹음들이다. 하지만 그의 레코딩에서의 관심도 워낙 넓은 편이어서 현대곡에서 그의 진정한 면모를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9. 마르타 아르헤리치 (1941∼ )

아르헤리치는 94년, 기돈 크레머와의 내한 연주회에서 피아노 현을 끊어뜨리는 ‘시범 아닌 시범’으로 가공할 만한 파워와 타건의 집중력을 한국 팬들에게 확인시켜준 바 있다. 그는 20세기 후반을 풍미한 명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다. 그를 특별히 ‘여류’라는 꼬리표를 달아 따로 분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는 남녀를 통틀어도 스케일이 크고 힘차며 역동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다고 섬세한 시정의 표현에 약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특히 아르헤리치를 들어 제멋대로이고 변덕이 심하며 신경질적인 피아니스트라 할 수도 없다. 그녀가 여성이라 그렇다는 얘기는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편이 좋다. 남성 피아니스트들은 더욱 심하지 않은가! 물론 그가 연주회 취소를 밥먹듯 해오긴 했지만. 최근에는 실내악 연주가 많은 편이라 훨씬 덜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이 신뢰하는 파트너와의 연주는 취소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인 1949년에 데뷔했으니 그의 연주인생도 올해로 반백년인 셈이다. 16세 때인 1957년에는 3주 간격으로 열린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연속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때문에 혹사당하기 시작했다. 그후 해마다 150회나 되는 협연은 그를 신경쇠약 직전으로 몰고 갔고 급기야 일단 후퇴해서 휴식기에 들어간다.

1961년부터 그는 미켈란젤리에게 배웠다. 너무나 열정적이고 외향적인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서일까? 아니면 정말 무리한 연주로 감각을 잃은 탓일까? 미켈란젤리는 그녀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는 선고를 내렸다. 어쨌든 그 처방은 들어맞아 그녀는 재차 휴식기를 거친 뒤 1965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리고 한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질주하던 아르헤리치는 83년에야 멈춰섰다. 그리고 그녀는 실내악으로 연주의 초점을 돌렸다. 마이스키, 기돈 크레머, 그리고 마음맞는 음악친구들과의 공동작업이 역시 성공을 거두며 나타났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DG)는 그중 대표적인 명반으로 손꼽힌다.

그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녹음은 모두 3종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인 아바도 지휘의 베를린 필과의 것(DG, 1994년)이 좋으냐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의 것 (필립스, 1980년)이 좋으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시 아바도와의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과 라벨 협주곡(DG)이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와 ‘소나티네’(DG)도 유명하다.


10. 글렌 굴드(1932∼1982)

굴드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너무 주관적이고 독특한 스타일, 그리고 한정된 레퍼토리라는 점에서 그를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그래도 그가 20세기 후반의 모든 음악인들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있고,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는’ 연주가이므로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의 대열에 꼭 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굴드에 대해선 ‘신경쇠약 직전’이라고 표현하기가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쇠약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섬세하고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영혼이 또 있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미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영혼이 음악의 심오한 본질에까지 미쳤다’라고 다시 표현하면 어떨까.

그의 죽음은 어땠는가. 그는 너무 자주 신경증적인 ‘가짜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서 정작 치명적인 ‘진짜 통증’이 왔을 때 의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거짓말쟁이 소년과 늑대’라기 보다 ‘가녀린 영혼과 죽음’에 가까운, 너무나 아까운 죽음이었다.

굴드가 그토록 기인처럼 보였던 이유도 이제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였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진정한 예술의 구현을 위해서 주변의 모든 조건들은 가장 적합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굴드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학대하고 희생해 준비한 것으로 진정한 예술을 들려준 것이다.

그의 연주는 기계적인 정확성과 제어능력을 바탕으로 한 기교의 바탕 위에 섰다. 그리고 성부간의 우열이 없다. 바흐에서처럼 다른 곡들도 각 성부가 평등하게 대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는지 모른다. 그에 따라 모차르트의 소나타 연주(소니)와 같은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굴드의 최종 목표는 바흐가 항상 그랬듯이 푸가였다. 그의 음반을 말하자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소니)만을 얘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굴드의 바흐 연주는 모두 굴드가 자신을 희생해서 준비한 위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예술의 구현을 위해 신경쇠약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