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득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예상하지 못한 만남,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문장, 혹은 짧지만 강렬했던 한 계절이 이후의 시간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문장을 읽고, 어떤 시간을 지나면서 삶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진다. 벤자민 마이어스의 수평선 너머 는 바로 그런 변화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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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로버트는 문득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열여섯 살의 여름을 떠올린다. 광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 역시 광부가 될 운명이었던 소년. 그러나 로버트는 석탄과 전쟁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다른 세상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 끝에서 덜시를 만난다.
바닷가 오두막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덜시는 로버트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세계의 사람이다. 자유롭고 유쾌하며, 책과 시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로버트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다. 아무런 편견도 기대도 없이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덜시를 통해 로버트는 문학과 시의 세계를 알게 되고, 세상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담에 머물지 않는다. 소설의 또 다른 축에는 덜시의 상실이 있다. 소중한 사람인 로미를 잃은 덜시는 오랫동안 그 슬픔을 마음속 깊이 묻어둔 채 살아왔다. 그러나 로버트의 등장으로 그녀는 마침내 상실을 직면하게 된다. 로미가 남긴 시를 읽고, 그 시를 세상에 내보내는 과정은 덜시가 애도의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인생의 여름에 있는 소년과 인생의 늦가을에 선 노인은 서로의 시간을 나누며 각자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 삶에도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은 내게 글쓰기가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신학기가 되면 자신을 주제로 에세이를 써 오라는 과제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 첫 에세이였다. 글을 읽고 나누었던 선생님과의 대화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쩌면 덜시가 로버트에게 그랬듯, 누군가는 내게 다른 세계를 가리켜 주었던 것이다.
소설 속 덜시는 말한다.
“네가 배운 모든 건 너 스스로 배운 거야. 내가 한 일이라곤 너에게 그쪽을 가리킨 것뿐이란다.”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사람은 사실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게 다가온다. 전쟁과 혐오, 분열과 갈등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조건 없는 친절과 환대, 문학과 예술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아름다운 문장과 살아 있는 자연의 풍경, 그리고 삶을 향한 뜨거운 긍정으로 가득한 이 소설은 잊고 지냈던 나의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문학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한 사람의 다정함이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을 다시 한번 되살려 주었다.
누군가의 삶에 수평선 너머를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그 손길 덕분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사람. 『수평선 너머』는 그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찬가였다.
덧, 책을 덮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덜시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혹은 이미 누군가의 덜시였는지도 모른다고.
#이키다서평단 으로 도서와 제작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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