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협찬 #폴오스터 #정영목_옮김 #열린책들
“왜 다른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진 반면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은 기억 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지.”p.141
폴 오스터의 마지막 소설. #바움가트너 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의 이름은 나무를 가꾸는 사람 즉, 정원사라는 뜻이다. 기억의 정원에서 우연히 찾은 지난 날의 순간들을 통해 삶에 담긴 깊은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바움가트너는 아내를 상실하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여러 일들 속에서 불에 타버린 냄비를 보고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46년을 함께한 아내 애나의 죽음은 그렇게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왔고 깊은 기억은 갑자기 튀어 나온다. 상실 후에도 애나 없는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그의 마음은 감히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움은 애나의 타자기 소리도 들리게 하고 이미 끊어진 전화기로 전화도 걸려오게 하는데…
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p.37
육체의 상실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겪는 상실도 그 아픔의 깊이는 같을 것이다. 매 순간 아픔을 상기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까. 아니면 그 고통으로 인해 상실을 더 깊이 기억하고 싶을까.
이제 세부적인 것은 기억에 없지만, 한 가지, 어딘가에서 차를 세우고 피크닉 점심을 먹었던 일, 모래가 많은 땅에 담요를 펼치고 애나의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건너다 보았던 일은 떠오른다. 그때 그는 강렬한 행복감이 큰물처럼 밀려오는 바람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말했다. 이 순간을 기억하도록 해, 얘야. 남은 평생 기억해, 앞으로 너한테 일어날 어떤 일도 지금 이것보다 중요하진 않을테니까. p.242
살면서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 떠올려본다. 엄마가 나를 따뜻하게 포옹해준 적이 있었던가. 어릴 적 눈이 폴폴 날리던 겨울, 엄마 등에 업혀 병원에 다녀왔다. 눈이 그친 후 햇살이 비추었고 나는 마당에 나와 앉아서 귤을 까먹은 기억이 난다. 그때 귤의 달콤함이 생생하다. 내게 엄마의 사랑은 “사랑한다”는 단어가 아니라 눈 오는 날 나를 등에 업고, 달콤한 귤을 까주던 그때의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떤 큰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 기억들이 가끔 툭 떠오를 때가 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에 닿는다. 노년의 시간이란 어쩌면 균열 된 기억들을 잘 추스르면서 남은 시간을 마무리할 수 있는 선물 같은 것일까.
바움가트너의 기억들은 실타래처럼 얽혀 복잡하다. 그만큼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삶이 이어지니 복잡함은 당연하다. 40을 훌쩍 넘게 살아가다 보니 삶이란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각각의 삶에서 한 조각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도 지금을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고 내일의 삶에 대한 기대 또한 충분하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상실 앞에 서면 나는 눈물부터 나는데 아무래도 내가 먼저 갈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 남겨질 배우자가 나 없이 잘 살 수 있을지 너무 걱정된다. 아닌가? 기우일까?
미리 걱정하지 말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결론을 지어보자. 지금의 사소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갑자기 기억날 때 그 행복감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야 남은 이가 누구든 그 삶 또한 잘 살아 질 테니.
문장들에서 정신없이 헤매고 흠뻑 취해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최근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좋았다는.
@openbooks21 열린책들 서평단으로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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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인간 그루터기,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반쪽을 잃어버리고 반쪽만 남은 사람인데, 그래, 사라진 팔다리는 아직 그대로이고, 아직 아프다. 너무 아파서 가끔 몸에 당장이라도 불이 붙어 그 자리에서 그를 완전히 태워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P37
오늘 일을 일찍 중단하고 이 근사한 오후에 뒷마당에 나와 앉아 생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좋다. 단기 기억이란 걸 이렇게 짚어 가다 보니 장기 기억도 생각하게 되고, 장기라는 말과 함께 먼 과거의 이미지들이 마음의 저 먼 구석에서 깜빡거리기 시작하여, 갑자기 무엇을 발견할 수 있나 보기 위해 그곳의 덤불과 관목을 뒤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P135
이제 구름은 옮겨 가서 해는 가리지 않았지만 빛은 조금 변했다. 간신히 알아차릴만큼 미세한 변화지만, 그런 변화로 인해 사물이 더 진해지고 결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