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남자 분석하다 푹 빠져 동화된 듯. 그들의 반페미, 여혐 정서를 ‘이해’라 쓰고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철저히 남성의 시각으로 ‘여자만 힘드냐? 남자도 힘들다’를 길게 늘어놓는 이상한 책.
2030 남자들 속사정이 이러니 그동안 그들 이야기에 귀 기울지 않은 온 세상이 그들을 존나 우쭈쭈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개웃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긁어모아 가해자에게 서사 부여하고 정당화시키는 건 처음 봄.
저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보수 정당에게 표 뺏기기 너무 싫어서 2030 남자 머릿수를 ‘득표수’로만 생각하기 때문인데, (문제가 많더라도) 2030 남자들 말 잘 듣고(그게 얼마나 개소리인지는 상관 없음) 페미니즘 좀 적당히 해야 우리가 그들 표 가져올 수 있고 그래야 우리가 이긴다는 정치병자적인 발상.
이 책 저자 배수찬이 이걸 본다면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일베가 2030 남자의 생각이 그렇다고~ 잘못 이해했네~”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러면 니가 글을 존나 잘못 썼네~ 글 존나 못 쓰네~ 근데 그게 글솜씨 때문일까...?”라고 대답하겠다.
‘여성 독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젊은 남성의 반발은 악마의 어깃장이 아니다. 혜택에서 소외된 남성들이 있고, 그들의 영혼도 누군가 돌봐야 한다. 국가가 못한다면 공동체가, 공동체가 못한다면 뜻있는 개인이라도 나서야 한다. 그 일은 민감하고 어렵다. 남성들은 약자정체성을 혐오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뒤로 숨어서 거친 언어로만 화풀이를 해댄다.’ (p.230)
기가 차는데... 왜 이걸 여성 독자한테 당부하는지?
‘페미니즘 진영에서 긁혔는지는 모르겠다.’ (p.226)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논의가 불편할 것이다.’ (p.233)
이딴 소리는 굳이 왜 하는지?
이밖에도
1. 박원순, 성재기 미화하고
2. <82년생 김지영> 내려치며
3. ISIS에 가입하러 가다 실종된 김모군의 “요즘 시대는 남성이 반대로 차별받는 시대야. 그래서 난 페미니스트를 싫어하지. ISIS가 좋아”라는 트윗을 인용하며 그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헤아려 주고
4. 살인범 장대호가 다수의 남성을 대변한다며 그의 글을 여러 차례 길게 인용하는데, 장대호가 쓴 반페미 여혐글을 소개하며 아래와 같이 미친 개소리를 씨부리기도 한다.
‘나는 이글을 세상에서 가장 읽기 쉽고 핵심을 찌르는 페미니즘 비판 문서로 추천하고 싶다. 이 탁월한 문장력이 그의 끔찍한 살인과 유명세 덕준에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이없다. 살인자라는 두터운 편견이 독자들을 멀어지게 할 거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라도 알려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p.227)
장대호의 개빻은 글 인용 후에는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그의 글을 찬양하지 않았다. “읽기 쉽고 핵심을 찌른다”고 평가했을 뿐이다.’(p.230) 라며 슬며시 발을 빼는 졸렬한 모습까지 보이는데...
5. 불법촬영물 시청/가해자 적!극! 옹!호!
‘원인을 제공한 남자들이 나쁘고, 그들이 처벌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잃는 것의 크기를 비교하고, 여성의 손해가 남성의 손해보다 크다고 단정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불법촬영물이나 음란물울 시청하다 발각된 남성도(피해여성과는 다르지만)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의 치면과 평판이 훼손됐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불법촬영물 시청은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여성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이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남자들이 잘했다는 말이 아니다. 과거에 수치심에 자살한 여성들이 많았듯이, 오늘날 성비위가 발각된 남성들도 자살을 선택하는 일이 심심치 않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오는 불법촬영물을 시청한 남성들에 빙의해서 생각해 보자. 그들의 가정은 어떻게 될까?’ (p.238-239)
?????????? 미친놈인가???
그러면 윤석열 가정은 어떻게 될지 걱정 안되냐?
마지막으로 정희진 선생님의 칼럼 ‘남성도 힘든 이유‘를 인용하며.
진실은 이것이다. ‘힘들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다 힘들다. 부자도, 백인도, 건강한 청춘도 고뇌와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요지는 개인마다, 집단마다 힘든 이유가 다르다는 점이다. 백인이 힘든 이유는 백인들 간의 계급갈등 때문이지, 흑인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흑인은 백인 중심의 인종주의 때문에 힘들다. 이 구조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이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비장애인)’의 삶도 힘들지만 장애인 때문에 힘든 것은 아니다. 이성애자의 삶도 힘들다. 그러나 이 역시 동성애자 때문은 아니다. 장애인과 동성애자의 일상은 비장애인 중심 사회와 이성애 제도 때문에 ‘매우’ 힘들지만 이들이 겪는 억압과 차별 문제가 제기되면, “이성애자도, 비장애인도 힘들다”고 반박하는 이들은 드물다. 다른 반응, 이를테면, 동정이나 혐오가 따른다.
반면, 성차별 문제에서는 “남자도 힘들다”는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공적 활동이 활발하기에, 더 위험한 삶을 사는 것은 사실이다. 남성은 사건, 사고, 범죄율 등으로 여성보다 수명이 짧다. 성비는 여아 대 남아의 탄생 비율을 말하는데, 남아가 좀 많이 태어나야 정상으로 본다. 생애 도중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자는 힘들다.
문제는 ‘남성이 힘든 이유가 여성 때문인가’다. 남성의 삶이 힘든 이유는 남성 문화가 만든 계급, 인종, 지역 차별 등에 의한 것으로, 성별 제도의 피해 집단은 여성이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의 임금을 반으로 깎고, 여성이 남성을 성폭력하고, 가정에서 구타하고, 전업주부(主夫) 남성을 ‘대디 충’이라 하진 않는다. 물론 징병제는 문제지만 남성의 입대는 지배계급 남성이 자기들은 안 가고 ‘없는’ 남성들만 보내기 때문이지, 여성과 장애인이 남성을 군대에 보낸 건 아니다. 국민개병제는 이승만이 시행했으며, 모든 남성이 같은 조건에서 복무하지도 않는다.
‘남자도 힘들다’는 언설은 젠더를 사회 구조로 인식하지 않아서다. 다음 단어를 보자. 계급 ‘의식’, 지역 ‘감정’, 젠더·평화·인권 ‘감수성’? 계급 문제는 최상층의 인간의 의식이고, 지역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감정적이며, 젠더는 ‘따뜻한’ 감수성인가.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은 인간 의지가 만들어낸 제도다. 피억압과 차별 경험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각기 다른 양상의 제도들에 위계를 두어 ‘사소한 문제와 중요한 문제’로 나누는 사고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발상인가.
한국 사회의 젠더 인식은 정부, 시민사회, 학계 모두 매우 낮다. 젠더 전문가 부재도 심각하다. 사회는 성차별 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피해 상황을 묵살한다. 그 결과, 남성들은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슈를 끌어안고 고뇌에 시달린다. 남성들의 현실 인식 부재가 남성이 괴로운 이유다. 성별 제도는 인종주의, 계급주의, 학벌주의처럼 가해와 피해가 분명한 권력관계다. 현재 한국 사회 일부 남성의 모습은 백인 부자가 가난한 흑인들에게 “나도 힘들다”고 한탄하고 분노하고 심지어 증명하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