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지아, 나의 아름다운 날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알려진 정지아 작가의 작품이다. 요즘 지난 문학과 지성사 서평단 당첨 이후, 알고리즘에 자꾸 서평단 광고가 뜨는데 책 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강렬한 유혹이다. <나의 아름다운 날들>도 역시 서평단에 응모해서 읽게 된 단편소설집이다. 정지아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는데, 수록되어 있는 소설들이 너무나 주옥같았다. 이 작가를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 의아할 정도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숲의 대화]
영혼이 되어 찾아 온 도련님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하는 운학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내 발가락의 점마저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어 영원히 합일될 수 없는 불운은 운학의 것이다. 사상을 좇다가 죽음을 맞이한 도련님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고, 도련님에게 마음 준 여인과 한평생을 마음 주며 산 운학의 사정도 알 수 있었다. 사내의 마음 속에 맺힌 한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안타까웠다.
[천국의 열쇠]
눈 뜨는 순간부터 삶이 고난 그 자체였던 남자. 제 몸 하나 일으켜 세우는 일이 그에게는 우주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그 남자가, 또 다른 고난 속에 살고 있는 여인을 만난다. 죽을 만큼 힘든 순간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고 쓸모 없다고 느껴질 만한 상황에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는 호아를 헛개나무 농장으로 이끌고 열쇠를 쥐어주었을 뿐이지만, 호아에게 그 열쇠는 천국으로 향하는 것과 다름없다. 헛개나무 농장으로 발걸음을 떼는 순간 호아는 소중한 존재로 변모한다.
<그 발을 그는 떨리는 한 손으로 받쳐 들고 구석구석 흙 알갱이 하나 남김없이 정성들여 닦는다.>(87p)
[목욕 가는 날]
작품 속 언니의 모습도, 동생의 모습도 모두 가지고 있는 ‘나’는 소설을 읽으며 자꾸만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가 만들고 있는 세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나에게 참 강렬했다.
<어떠한 세월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아웅다웅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어머니와 언니의 지난 세월이 오늘 고스란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어머니의 세월도.>(111p)
[브라보, 럭키 라이프]
<담당의사마저 놀라게 한 기적이었다. 아드님이 행운의 사나이인 모양입니다. 의사생활 33년 만에 이런 기적은 처음입니다.>(131p)
마흔에 본 늦둥이 아들 경우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노부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들의 치료와 재활에 전념한다. 눈을 뜬 것도 행운, 휠체어에 앉을 수 있게 된 것도 행운임이 분명한데. 매일 재활치료를 받으러 힘겹게 휠체어를 밀고 버스에 오르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안쓰러운 것은 왜일까. 맏이의 날카로운 불평을 들으며 경우는 버둥거리는데, 아버지는 그것조차 기적이라며 가슴벅차한다. 이 ‘행운’이라는 두 글자가 이 소설 속에서는 너무나 무겁고 아프다.
[혜화동 로터리] 이 소설은 전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김, 최, 박 세 노인의 독특한 관계는 오랜 시간 동안 서사를 형성하는데, 시간이 흘러 그들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사상이며 전쟁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것 같다. 책에서 가장 무거운 소설이었다. 그들이 짊어진 무게를, 겪어보지 못한 나는 짐작만 할 뿐 절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겪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이런 작품들을 볼 때마다 숙연해지곤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울지 않았을 뿐 박도 최도 같은 심정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짓밟은 사상이란 것이 눈앞에서 실감으로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도 최도 강도 거기 짓밟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p.201)
[인생 한 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름 한번 제대로 불려 본 적 없는 ‘김옥성’ 씨가 고추밭을 가꾸다 커다란 바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김옥성 씨의 집념이 애처로워 보이는 이유는 왜일까.
<태곳적의 흙덩이를 뒤집어쓴 채 그는 급속히 늙어 한 줌의 흙이 된다.>(p.234)
[즐거운 나의 집] 전혀 즐겁지 않은 작가의 뉴하우스. 도피처로, 아니면 희망을 찾기 위해 공들여 지은 집이 골칫덩이가 되었다. 전원생활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같이 분개하기도, 안타까워 하기도. 도시에서 한 시간 거리의 시골 마을이지만 그곳에서만 묵인되는 독특한 윤리의식과 문화가 흐르고 있는데, <김복남 살인사건>이 읽으면서 떠올랐다.
[나의 아름다운 날들] 표제작이다. 나는 이 표제작의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읽은 것인데, 제대로 낚였다. 김여사에게‘만’ 아름다운 날들, 아름다운 세상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복에 도취되어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그녀는 이 소설에서 풍자의 대상이다. <꺼삐딴 리>와 유사한 결의 작품이다.
[절정]
두 살 차이나는 노숙인 그와 ‘김’. 누가 더 나은 처지라고 할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 ‘김’은 존경의 대상이자 희망을 잠시라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존재이다. 자식들을 위해 한 달에 20여 일을 막노동을 하고 많은 돈을 송금하는 그. 소처럼 일하다 병에 걸리는 김의 이야기를 보면 인생 참 매정하다 싶었다. 서울역에서 추위에 떨며 잠을 청하는 노숙인들, 그들은 얼마만큼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 외 <봄날 오후, 과부 셋>, <핏줄> 역시 주옥같은 단편이다. 소설의 매력은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인데, <나의 아름다운 날들>에 수록된 작품들을 읽으며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났고 마음 속에 여러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누군가 얼마 전, “나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사는데,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는 말을 한 것이 가슴에 사무친다. 이야기는 아무래도 삶 그 자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