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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하늘빛마음  2015/03/17 07:06
♥보다  (김영하)

영화는 무엇보다 2차원이라 한                오스터의 글귀가 시선을 끈다
책이 3차원이라고.

128쪽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의 세계가 우리들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폴 오스터의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열린 책들 2001)

'하지만, 영화도 좋다😐'



150쪽 나무와 바위의 비유는 꽤나 근사했다.
나는 언제나 비유와 대구로 이루어진 수사에 잘 설득되곤 했다.

123.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
122.....를 보고 나오면서 떠올린 것은 오래 전에 연극연출가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보는 건 지루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는 거 지루해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군인이든 학생이든 정신병원의 환자든 막상 연기에 들어가면 바로 몰입하거든요."
"사람마다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 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있는 이 오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123 조이스 캐럴 오츠는 마를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에서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마를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171각각의 윤리적 딜레마를 힘겹게 풀어가면서 살아가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속 가족의 모습이 아마 우리가 미구에 경험하게 될 가족상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느슨하고 어지러운 가족 관계속에서는 영화 속 아메드와 같은 태도가 바람직 할 것이다. 그는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되 누구의 말이든
주의깊게 듣고 보편적 윤리에 호소한다. 니가 딸이니까 이래야 한다, 당신이 엄마니까 이래야 한다는 당위의 언어는 함부로 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구성원에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을 조심스럽게 요구한다. 가족과 타인을 가르는 기준이 급속히 희미해지는 시대, 그런 아버지가 미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선은 자신이 예측 가능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탐정의 눈으로 자신의 일상을 면밀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는 것이다. 출근길을 바꾸고 안 먹던 것을 먹고 안 하던 짓을 하며 난데없이
엉뚱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차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 되어 갈 것이다. 이런 엉뚱한 연습에서 얻어지는 부산물도 있다. 바로 자기자신에 대한 감수성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


김영하의 이름은 언뜻 언뜻 들어보았다. 처음이다. 책을 본 것은. 좋다.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의 책이 나에게 제일 좋은 책의 시작이었고,
알랭 드 보통의 시리즈를 찾아서 읽어 볼 정도로 나에게 맞는 책인데, 김영하의 책도 좋다. 다른 책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미 시권역안의 시립도서관의
김영하책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안 읽어보고 시리즈를 다 구매하고 싶을정도로 이 '보다'라는 책은 재미지다.
하나씩 읽어보아야지. 알랭 드 보통의 책처럼.
알랭 드 보통과 김영하의 나이는 비슷하거나 한살 차이? 이거나 할 것이다.

산문이라는 글쓰기의 한 형태로 (자신만의 생각을 사회문제와 하나의 이야기나 영화이거나, 책이거나 등등에 결부하여 통찰력있는 하나의 단편으로 )거듭난다.
통찰은 지식의 습관화된 내면화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어떤 이가 티비에서 말한 것을 보았는데, 그런 부분도 많은 것 같다.
책으로나마 이런 사람들의 내면을 접하면서 습관화되면서 나의 생각의 방향과 초점을 조금씩 수정해 가면서 사는 건 재미지다.
물론, 일상의 소소함과 화남과 짜증이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또 책을 보며 상상의 나래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마를린 먼로의 이야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누가 좀 말려줘~'하는 마음을 토닥이며 이어나가는 힘을 마련한다.

돈이 들지 않는다. 도서관을 이용하면, 그렇지만 또 가끔 책을 산다. 읽어보고 좋은 책은 나의 책장에 꽂아놓으면 우리 아이들이 책 제목을 보고라도 크면
나중에 책을 선택하는 감이 생기지 싶어서. 독서의 폭이 넓고 깊지 않아도 나만의 취향대로 읽은 책의 제목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엄마의 취향을 알 수
도 있고, 아 이거 엄마 책장에서나 어디에선가 본 책인데 하며 언젠가 필요할때 생각 언저리에 맴돌기도라도 할 힘이 될 것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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