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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님의 서재
                                        

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아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

 

        "너는 너무 설명이 많아. 왜 그렇지?"

        하치가 말했다.

        "설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일 수 없는 환경이었으니까"

        나는 말했다.

        "그것 봐, 또 설명하고 있잖아."

        하치는 웃었다.

        "온 세상이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조그만 편린으로 잘라내는 거야."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고마워요, 하치.

        그렇게 소중한 것을 가르쳐준 일, 평생 잊지 않을께요.

        설사 사이가 나빠져서 말조차 걸지 않게 되더라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더라도,

      그 일에 대한 감사는 지우지 않을께요.  

 

        -하치의 마지막 연인-요시모토 바나나

        -2005. 12. 03. SAT. AM 09:47

 

        난 그런게 부러웠다.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꼭 해야할 일이 있는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까페에 가서 무슨 특정한 차를 마신다거나,

        아님 누군가와 수다를 떨 수도 있겠지?

        아니면 지저분한 몰골로, 질질 짜면서 갑자기 방문해도

        기꺼이 맞이하여 달래줄 수 있는 친구집.

        우울할 때 비상구가 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

        이제는 나에게도 그런 것들이 생겼다.

        쓸쓸하거나 외로워 미칠 지경일 때,

        이상하게도 일본소설을 손에 들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갑자기 용기도 생긴다.

        사람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는 일본 소설이

        내 마음도 알고 위로해 주는 기분.

        누군가에게 말로 하려해도 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기분들을

        이 녀석이 정확하게 읽고 달래주는 것 같아 좋다.

        거기에다 따뜻한 차까지 후루룩 불어주면 금상첨화겠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아질 때까지 떨어져 있으면 돼."

        "무슨 소리야?"

        "이 세상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잖아?

         아무리 해도.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안되는 사람."

        "그래서"

        "하지만 그 사람도 죽잖아.

         똑같이, 화도 내고 울기도 하고, 사람도 좋아하다가, 죽잖아?

         그런 생각이 들면, 용서해 주자고 생각하기도 하고,

         싫어할 수 없게 되잖아. 그건 멀리서 본다는 거야.

         저 파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빛하고 구름이 아룸다우면, 그 사람도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상쾌하면, 용서하잖아?

         그럭저럭 좋아지잖아?"

 

         하치의 마지막 연인 마오짱.

         하치가 죽는 것도, 둘이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치의 마지막 연인은 분명 마오짱이었다.

         그들에게 미래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에,

         또 오래도록 변치 말자는 약속도,

         자기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원도 없기 때문에,

         내일 들어갈 감옥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일들을 쉬 알 수 있다.

         부자유스러움의 얼개를.

         그리고 매사 물러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활기 차게 해주는지를.

 

         사랑의 열정이 이별의 조짐을 불러들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어린애라서, 이별의 의미를 몰랐다.

         아마도 영원히 알 수 없는 타입이리라.

         언제나 똑같은 곳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운다.

         "하치, 보고싶었어"

         나의 눈에서 때맞춰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나 자신은,

         '하치가 안 보이니까 눈물이여 멈춰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상상하곤 해.

         우리 둘만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상상해봐.

         머리를 감겨주기도 하고

         가끔은 아침밥 지어줄 거야?

         아니면 그냥 훌쩍 밖으로 나가 거닐기도 하고

         영화를 보고 둘이 울 수도 있을까......

 

         우리 둘이 나이가 들어서도 영원히 잊지 말자

         약속을 기다리는 설레는 기분을

         비슷비슷한 밤이 오는데 절대로 똑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 둘의 젊은 팔  똑바른 등줄기

         가벼운 발걸음을

         맞닿은 무릎의 따스함을

 

         그렇다는 걸 몰랐다.

         매일 아침이 다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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