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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님의 서재

  왜 현실에서는 물론이고 소설에서조차도 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것일까? 현실의 사람들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일컬어 '소설 같은 사랑'이라며 마치 그 사랑이 소설 속에서는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자위하며 자신의 포기를 합리화하고, 소설 속의 인물들은 현실의 인간들 같은 통속성(通俗性)을 부정하려 애쓰며 내 마음 속 사랑은 물론이고 남의 마음 속 사랑까지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폼나고', '쿨하게' 손 흔드는 길을 택한다. 그렇게 서로 웃으며 손 흔드는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진심은 아니란 걸 느끼면서도. 결국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우리가 입에 달고 사는 통속적인 러브 스토리는 없다. 현실의 인간들이 '통속성'의 의미를, 그 통속적인 사랑이 가져다주는 시련의 무게를, 소설 속에서나 이뤄질 법한, 막대하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한 사이, 소설 속의 인간들은 세속의 인간들이 그런 고난쯤 거뜬히 이겨내고 사랑을 얻어냈으리라 지레 짐작하고는 자신들이라도 그런 상투성의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에 사명감이라도 느낀다는 듯이 결연하게 '사랑'이 아닌 '사랑에의 추억'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결국 이렇게 이뤄지지도 않을 사랑을 위해 겪어야하는 통과의례의 혹독함을 예외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의 그것이 더 어렵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의 사랑의 소멸은 모든 통과의례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적인 요소인 현실에서의 상투성에 대한 반발이라는 강박관념에서 기인한 성질이 다분하다. 그에 비해서 현실에서의 사랑의 소멸은 통과의례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써 얻어질 사랑으로 하여 더 많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진솔한 의미에서의 어려움 내지는 두려움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실에서 정작 통속성의 사랑이 부재(不在)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따른 상실감을 채워줄 대리만족을 위해 역으로 소설에 있어서 하나의 정해진 순서로 이뤄진 듯한 판에 박힌 상투적인 사랑이 강요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에 이르는 그 수많은 과정들을 논하기에 앞서서, 사랑이 이뤄진다는 그 하나만으로 상투성의 유·무를 공박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어불성설이라는 점이다. 독자에게 필요한 미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다. 자신에게 정직한 독자라면 자신이 노력한 끝에 다다른 결말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동안 자신이 그럭저럭(?) 즐겁게 밟아왔던 그에 이르는 과정들까지 부정하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독자들의 관용이 사랑의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의 작가의 태만함에 대한 면죄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 이야기의 결말에 있어서의 상투성을 피하기 위한 강박관념이 결국은 정반대의 새로운 상투성을 고착시키게 되는 우스운 강박관념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이지, 애초에 피하려했던 스타일의 결말이 지닌 상투성을 적극 옹호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결론을 위해서 줄거리의 상투성도 권장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작가의 결론에 대한 공박, 아니 그를 넘어서 다른 독자들의 관점까지 설득시키려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누구 못지 않게 정직하지 못한 독자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내 정직함을 지키려하다가는 왠지 내가 정말로 정직하지 못한 인간이 될 것 같다는 묘한 불쾌감이 나로 하여금 이런 식의 글을 쓰게 만들었다. 사실 끝 부분의 '해설'에 나와있는 대로 아직 우리에게 있어 1980년대란 떠올리는 기억 속의 존재일 뿐, 읽는 책 속의 존재는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시절을 이 정도의 디테일로 현현시킨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평균 이상의 참신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때로 단순한 기억 그 자체의 섬세한 재현은 그 하나만으로, 그 시대 자체와도 무관하게 그 어떤 세밀하고 복잡한 구성 못지 않은 새로움을 안겨주는 법이다.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의 상투성이 용서받을 수 있는 지점도 바로 그 시대의, 그 나이의 소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첫사랑의 정취의 사진으로 찍어낸 듯한, 섬세한 포착에 있다. 사랑을 하기로 마음먹은 뒤에 은수를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3년 간의 시간은 '현실적으로(또는 보편적으로)' 기타, 독서, 공부 중 어느 하나를 완성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기에 1년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씩 미션을 완수해가는 은호의 모습이 관점에 따라선 지나친 과장으로 보일 법했지만 조력자인 '현주'라는 매력적이며 시의적절한 캐릭터의 구현은 읽는 이의 의구심을 왠지 미소 섞인 수긍으로 감싸안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해설에서 '달'에 비유되었을 정도로 은수라는 '태양'이 없는 은호의 나머지 삶을 지켜주었던 현주의 역할은 보너스 트렉에서의 차분한 독백으로 섬세하게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조력자의 존재가 이미 남들보다 여러모로 뒤쳐진 자리에서 시작한 은호가 매야만 했던 유·무형의 굴레들의 존재를 잊혀지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끝내 어느 것 하나 민석이처럼 손쉬운 일이 없었다. 그런 그가 도달한, 일단은 큰 목적지라고 부를만한 자리에서 그에게 그가 원하던 것을 끝내 주지 않은 것이 과연 수긍할 만한 결론일까?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와 사랑해주는 여자가 둘 다 있었다. 그의 사랑도 그가 받은 사랑도 어느 것 하나 단순하거나 맹목저인 점보다는 서로에게 조금씩이라도 다가가고 싶고 좀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애틋함과 절실함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어느 누구의 사랑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게는 이런 결말이 처음엔 그저 아쉬웠고 나중엔 급기야 짜증스러웠다. 언뜻 스친 소설책이나 밑줄 쳐가며 꼼꼼히 읽은 소설책이나 어느 책에서도, 현실에서도 좀처럼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 그 사랑 하나가 그 속에서도 이뤄지는 모습을 좀처럼 보지 못했던 스스로의 과문(寡聞)한 기억 탓이었다.
 
 어차피 20여 년 후로 이어질 결말에서 어디 살던 누구인지도 모르는 인물의 파경 예고로 어렴풋한 암시를 줄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20년 전에 둘 중 누군가와의 사랑을 이어주고 그것으로 20년 후의 희생양을 삼을 것이지 왜 굳이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내가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현실 속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사랑 때문에 고난을 겪는 인간의 상당수는 그 고난을 참아내고도 결국은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현실에서의 원인이 사실상 어느 한쪽의 자의(自意)에 의한 '포기'라면 소설 속의 그것은 아직까지 현실에서 살아남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통속성의 악몽에 지레 겁먹은 제삼자인 작가에 의한 타살 내지는 강요이다. 결국 내 안타까움은 어디서도 사랑이 아니라 그 무엇이 되었든 원하는 것을 얻어서 잠깐이라도 행복해하는 인간의 소박한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사랑은 상투적일 지라도 행복만큼은 상투적일 수 없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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