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렇게 경선의 맨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라. 여전히 피부가 희고 고운 편이지만 눈가와 뺨에 촘촘하게 잔주름이자리잡고 광대뼈 근처에 잡티도 많이 올라와 있다.- P76
안나는 다시 손을 들어 여전히 찡그려져 있는 경선의 미간을 조심스럽게 펴준다. 이 순간에도 경선은 자신의 얼굴이 늙은 환자의 증상을 나타내는 표지로만 읽히기를 원치 않을 것같아서이다.- P78
경선이 체중 조절에 민감한 것은 몸이든 머리든 둔한 것을혐오했고 그 두 가지를 치명적으로 둔하게 하는 술을 조절할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몸을 움직이는 일 가운데 경선이 좋아하는 건춤뿐이었다.- P79
나이가 들어 기력이 달리면서 욕망 또한 거기 맞춰 둔해진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 감당할 만큼만 몸이 욕망하는 것이다.- P50
마치 극장의 관객처럼 지정된 좌석의 어둠속에 앉아 매일같이 세상의 하루라는 영화를 보는 거라고 여겼다.- P81
병실은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또 일터이기도 하다. 환자와 간병인 모두 자기 인생의 하루를 살아가는 중이었으며 모든 삶이 그렇듯 매일이 똑같지는 않았다.- P85
"몸이 기능을 안 하는데도 욕망은 생겨나는 거지. 그리고 그걸 충족시키려고 오히려 환상이 더 강해져. 그게 딱 지금 내가겪는 고통의 정체야."- P89
두 간병인은 안나 자매에 대한 인성 평가도 마친 상태였다.
언니는 다정하고 동생은 속이 깊으며 서로를 배려한다는 것이다. 안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의아한 표정을 보았는지 최순영은 자신들처럼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고 상대해온 사람의 눈은틀림없다고 못박았다.- P91
문 하나짜리 조립식 옷장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물건이겹겹이 쌓인 소형 철제 행거가 겨우 비집고 서 있다. 그 집에서 유일하게 큰 물건은 거울뿐이다.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있는 그 거울에는 좁은 방의 모습이 모두 담긴다.- P95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서 난 귀여운 할머니 같은 말도 싫어. 늙으면 수동적이고 퇴행적인 거 말고는 매력을 부여할 방법이 없다는 거야?"- P105
주치의가 건네는 진단서에 적힌 경선의 병명은 ‘상세 불명의 악성 신생물‘이다.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는 수납 창구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받으라는 말을 남기고 의사가 떠난 뒤경선은 숟가락을 들어 흑임자죽을 떠먹기 시작한다. 한 숟갈삼킨 뒤 보험 같은 거 없는데, 라고 한마디한다.- P107
그때에는 잘 몰랐지만 경선이 기다린 건 어떤 한 계절이 아니었다. 계절의 주기와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실험하고 느껴보고 싶었다.- P113
"나이들면 말 없는 사람이 인기 많아져."-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