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그곳에서 눈을 뜬다. 얼음조각처럼 하얗게 굳어버린 내 몸, 삼인칭이 된 내 몸을 내려다본다. 나는 나무 위에 있다.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만큼 크고 단단한 나무다.- P276
이마치는 검게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그곳으로 한 발 내디뎌보았다. 발목에서 잔물결이 흰거품을 내며 부서졌다. 금세 바짓단이 도로 젖었다.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한낮의 부드럽고 나른했던 물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얼음 같은 물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발을 잡아채는 느낌에 이마치는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이마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는 일흔 살이었고 아직도 삶이 놀라웠다.- P265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에요."
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를 비는 거야."
이마치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무 늦었지. 그래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P263
나는 만족한다. 이마치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유치원 기둥이라도 종일 깨물 수 있다고 생각한다.- P270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그곳에서 눈을 뜬다. 얼음조각처럼 하얗게 굳어버린 내 몸, 삼인칭이 된 내 몸을 내려다본다. 나는 나무 위에 있다.- P276
이제 내가 이마치의 곁을 맴돌던 유령임을 알 것이다. 노아의 그림자임을 알 것이다. 바다를 사랑한 서퍼임을 알 것이다.
몸을 입고 이마치를 만나는 일은 금기였다. 하지만 영원히 앎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마치를 향해 가야 했다. 이마치를 구해내야 했다.- P278
이마치가 끝까지 기억한 사람은 딸이다. 그 외에는 모든 이가 사물로 변해버린다. 아침이면 책장과 휴지통이 건들거리며다가오고, 접시와 리모컨이 말을 건다. 그리고 마침내 딸마저도 사라져버린다. 딸은 작은 머핀으로 변한다. 이마치는 그것을 방안에 감추어두고, 배가 고플 때마다 조금씩 베어먹는다.- P281
. 우리 자신이 파도 같다는 말에 이마치가 슬쩍 뒤돌아보며 웃는다. 그녀는 더이상 비밀이 없고,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날아오른다. 무한한 파도, 영원한파도, 그녀 자신의 파도 속으로.- P283
여기 일곱번째 책을 보탠다. 대단치 않은 소설이라고 해도 완성하고 보면 언제나 큰 기쁨이 있다. 발톱 열 개가 다 빠져도좋을 만큼. 살면서 그러한 기쁨을 누리는 것에 숨죽여 감사하고 싶다.
2025년 봄정한아- P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