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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eil

그래, 뭘 쓰든 그건 니 자유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근데그렇다고 해서 니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한테도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는 생각은 못해봤니? 내가이미 충분히 버거울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어? 무슨 염치로 그걸 말하는데?- P235
그 어떤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내가 듣기에도 궁색했다.- P236
내가 죽고 나서.
......? #이런 건 내가 죽고 나서 마음껏 쓰라고.- P237
그간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 실패하고, 나에 대해 쓰지 않는 방법을 찾는 데 실패한 것처럼, 나는 시간을 앞으로 빨리 감는 방법을 찾는 데 실패했다.- P241
그래서 엄마는 어땠는데? 내가 미웠어?
내가 한참을 웃다가 물었고,- P242
아니, 예뻤지. 너무 예뻐서 저기 사거리에 있던 베비라에서빨간색 들어간 거, 꽃무늬 들어간 거,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옷만 사 입혔지.- P242
혹시 말이야. 그런 게 다 너한테 영향을 준 걸까? 내가 잘못한 건가?- P243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요구르트 세 줄을 샀다. 그리고 두 줄은 파란집 할머니네 대문 앞 의자에 봉지째걸어두었다. 문득,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몇 마디가 생각나 적었는데 결국 메모는 넣지 않았다. 그냥야쿠르트를 배달하는 성범이 엄마가 주고 간 거라고 믿으셨으면 해서. 야쿠르트가 아니라 요구르트여서 완전히 속일 수는없겠지만.- P248
그때 엄마가 전화기 너머에서 말을 이었다.
가까이 살면 좋겠어. 지금은 너무 멀어.- P251
*최근 장애를 보는 주된 관점인 ‘사회적 모델‘은 장애를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가 제공하는 자원이 부족할 때 발생하는 사회적 불리함과 상대적인 활동 제약 상태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탄 사람 앞에 경사로가 없을때, 시각장애인에게 큰 활자의 책이 없을 때, 발달장애인에게 적절한 학습 보조가 없을 때, 비로소 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환경이 변하면 장애가 없어지기도하고 생겨나기도 한다. 장애는 개인에게 늘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바깥 세계와 만날 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장애인의 몸과 정신도 모두 서로 다르듯 장애(인)의 양상과 경험도 각자 다르다. 각자의 몸과 정신은 수없이 다양한 여러 형태의 인간 스펙트럼 중 하나가 발현된 형태일 뿐이므로, 모두가 서로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래 멸칭이었지만 자긍심의 명명으로 전유된 퀴어처럼, 장애를 (실패와 고난이 아니라) 고유한 신체(들)이자 자긍심의 매개(들)로 볼 수는 없을까.
여기에서 페미니즘 및 퀴어적 관점을 통과하여 장애를 해석하는 ‘정치적/관계적 모델‘이 시작된다(앨리슨 케이퍼,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이명훈 옮김, 오월의봄, 2023). 이는 좋은 몸, 좋은 삶, 좋은 미래에 대한 가치판단 체계가 편향되어 있음을 가시화하고 그 강박으로부터 모두를 해방하는 것이다.- P262
게이 삼촌이자 선배인 자신이 얼마나 씩씩하게, 아름답고 경이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면, 이미 학교에서 자연화된 규범적 남성성 때문에 위축되고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 찬오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P269
삶에 맞게 규범을 바꾸는 것이 사랑이다. 한정된 규범 내에서 ‘거의‘ 살게 하는 폭력 말고, 각자가 ‘온전하게‘ 살게 하는 것이야말로.- P273
그렇게 김병운 특유의 세대 간 ‘미리 보기‘와 ‘다시 보기‘는 퀴어를 단독자로 내버려두는 것이아니라, 퀴어 친족을 형성하게 하여 서로를 돌보고, 그를 통해다시 자신을 돌보게 한다.- P273
소설의 얼개도 더 자유로운 곳을 찾아 떠나지 않고 고향과 유년으로 회귀하는 패턴이다. 사건의 발단 역시 인물 ‘나‘
의 움직임을 통해 촉발되기보다는 타인이 들려주는 과거가
‘나‘의 곁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대개 엄마나 수다스러운 친구를 거친 집안의 소문, 동네의 풍문에서 소설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언은 짐짓 고립된 단독자로 상상되거나 자처하기 마련인 퀴어 인물에게 구체적인 가족의 역사, 이웃과의 관계성을 부여한다. 혐오에 맞선 단단한 개인 혹은 연인의 내밀한 이야기에 집중하던 한국 퀴어 문학의 관습에 비하면 김병운은 상대적으로 주변의 관계들로 확장하는 일에 더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게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는 개별적퀴어 존재론에서 사회적 퀴어 존재론으로 확장해간다. 지금김병운의 소설을 읽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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