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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열매는 지난해 시월 상달, 우리 둘의조그마한 이야기가 비롯될 때 익은 것이어니.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중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P11
빨래터는 실제 정류장 이름이었고 궁에서 흘러나오는개울이 있는 곳이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동네고양이들도 목을 축이며 빨래터 수문을 통해 창덕궁을 드나들곤 했다. 비탈을 내려가보면 빨래터 물길은 사람이허리를 굽히고 걸어갈 만한 지하 통로로 이어졌다.- P15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P17
"아부지가 낮이 없네."
"낯 없는데 어떻게 말은 하네."- P25
"그러면 뭔데? 왜 나랑 절교하는데?"
은혜는 해송들 위로 낮게 비행하는 쇠기러기들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앉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날개를 길게편채호를 그리고만 있는 새들.- P29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P33
"그 정도 용기도 없으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거야?
다시 강화도로 가겠다는 거야?"- P39
우리는 할머니가 한켤레씩 사준 스케이트를 각자 가지고 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받은 선물이었다.- P45
낙원하숙으로 온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이 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보면 강화석모도에서 혼자 전학 온 중2짜리 여자애가 그 집의 최약체였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어떤 병든 습벽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울로 온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늘 그렇듯 미래를 낙관했다.- P47
바다에 나가면언제나 놀 만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수영을 했느냐는 말은 네 첫 친구가 누구였냐는 말과 같았다. 머릿속에 없어도 그뒤로 기쁨이 계속되었기에 상실을의식할 필요가 없는 망각이었다.- P53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포도주 양조사업을 육성하매 안으로는 쌀술을 포도주로 대체하고 더 나아가 세계 만방에수출한다면 대대의 국민복(國民福)을 일으킬 것이다"- P59
"그 복병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 1밀리미터도 되지는 포도뿌리혹벌레."- P61
가. 제안 사항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을 위한 설계도서내 연혁 및 원형 고증 작성과 관련한 소장 자료 열람 협조를 요청드립니다.- P71
"그러니까요, 배우신 분이 그러면 더 안 되죠. 여기도한국어 하시는 분들 계세요. 자, 에브리바디 레츠고백투조선. 사아, 조센에타이무스릿푸시테미마쇼카? 아버님도궁궐 잘 보고 가시고요."- P77
"그런데 빈집 지키는 기분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뭐라도 채워져 있는 곳은 대온실밖에 없잖아요. 원래 쓰임새대로 있는 건 거기뿐이야."- P79
그건 주유소에서 내 코트를 망쳐버린 금성무 역시 원서동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번호를 받은 건나였지만 세탁비를 물어내라고 연락하지는 못했다. 차라리내 연락처를 알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뒤늦게야 생각했다. 그러면 물때를 기다리듯 편안하게 연락을 기다리면되는데.-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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