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어져라”가 아니라 “음, 맛있겠네”의 세계
:복고풍 요리사의 서정, 박상, 작가정신, 2021
(*작가정신 서평단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 대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우리 엄마랑 밤새 한 줄 한 줄 정성껏 싼 김밥이 같잖았어요? 시를 쓰듯 한 줄도 허투루 안 말았다고! 그렇게 싼 김밥 값이 같잖은 푼돈이라고? 그리고 배달원은 직업 아닙니까? 이런 거 하면 계급이 낮아? 그딴 매너도 교양도 없는 인식이 밑바닥 수준 아니에요? 당신들 김밥 먹을 자격도 없을 만큼 천박해!” (p.111)
그런지도 몰랐다. 시가 과학이고, 과학이 시였다. 나 같은 일반인이 시의 깊은 층위 안쪽에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 잘 몰랐던 건 당연했다. 시는 과학자들 읽으라고 쓰여진 것에 가까웠다. 우리 잘못을 탓할 시인도 없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p.339)
여기, 시를 쓰고 싶었던 요리사 이원식은 요리사 겸 시인인, 조반니 펠리치아노의 흔적으로 쫓아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한 국가인 삼탈리아로 밀입국한다. 그는 아마도 조반니 펠리치아노처럼 살고 싶었던 듯 하지만, 한국에서의 현실은 그저 여자친구 앨리스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요리사로서의 지극한 경지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중 한 방송사의 요리경연대회 준우승 후 각종 악플과 루머에 시달리는 처지다. 그가 밀입국한 삼탈리아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전혀 다르게 ‘시’가 유일한 ‘자본’으로서 통용대고 숭상받는다. 이원식은 그러한 삼탈리아에서 돈이 아닌 시의 가치가 지극히 높게 여겨지는 모든 상황들을 보며 경탄하는 동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소설가 박상이 주인공 이원식을 앞장세워 그려내는 ‘시’본주의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동안 나 또한 적응하지 못해 끝없이 현기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문학이 천시되는 사회 속에서 ‘시’가 그토록 대접받는 이 소설 속 세계를 마주하며 오히려 속이 울렁거리는 이유는 뭘까. 이 소설 안에 사용된 문체, 단어, 서사, 플롯의 구조 등이 보여주는 지나친 ‘과잉’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작가가 끝 없이 남발해대는 유머가 과해 처음 몇번은 웃었지만, 나중에는 그걸 보고 웃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질만큼 과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모든게 과해서 나는 이 소설에서 그 어떤 심오함도, 그 어떤 재미와 감동도, 그 어떤 아름다움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작가가 ‘시’를 미친둣이 사랑해서 조금 미친걸까(이 글을 작가분께서 읽으신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하고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가 정말 많은 시를 읽으며 애정해왔음을, 시를 쓰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던 흔적들을 읽을 수 있었지만, 나는 작가의 욕망을 한껏 터뜨려버린 듯한 이 소설을 읽고 다소 지치는 기분이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시’와는 아주 상관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소설 속 ‘삼탈리아’에 밀입국하도록 누군가가 떠밀고 어르고 달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사용된 이야기들을 재료로 이 소설의 의미를 찾자면 이와 같다. 자신의 아무 것도 담기지 않은 음식을 완성한 뒤 “맛있어져라”라고 말하는 게 아닌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음식을 만든 뒤 “음, 맛있겠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비록 이 소설에 대한 비호감에도 불구하고, 시 창작의 과정을 요리에 비유한 통찰이 상당부분 많이 담겨있고, 너무 빈번히 남발해서 그렇지 기막힌 은유가 담긴 문장의 플로우들이 많았다는 점 만큼은 좋았다. 하지만 너무 좋은 재료들을 무작정 혼합한 뒤 “맛있어져라”라고 말한다고 좋은 요리가 되지 않는다. 마치 소설 속 이원식이 요리경연대회의 결승전에서 자포자기하듯 만들어 선보인 요리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