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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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상처를 준 선생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소수의 예외적인 선생을 제외하고, 그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내게서 빼앗아가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가축으로 개조하는 일을 질리지도 않게 열심히 수행하는 '지겨움'의 상징이었다.
(중략)
유일한 복수 방법은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나는 그 싸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겨운 사람들에게 나의 웃음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싸움을, 나는 죽을 때까지 결코 몸추지 않을 것이다.
- 식스티 나인, 253쪽 지은이의 말 중
일본에서 87년에 출간된 이 소설이 당시 작가와 동년배였던 이들에게 어떤 향수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지를 상상해본다. 삼십대 초반이 되어 열일곱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
52년생 무라카미 류의 다분히 자전적인 소설 『식스티 나인』 은, 지겨움에 자신을 길들이고자 했던 학교와 사회에 유쾌한 방식으로 반항하고 저항했던 1969년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로부터 2년 전인 1967년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로 퍼져나간 히피문화가 무라카미 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이 이 소설에 여실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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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 단순하다. 책에 뒷표지에 설명되어 있듯 삶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겐'이라는 열일곱 살 소년이 그의 친구 아다마, 이와세 등과 함께 자신의 학교인 북고에 '바리케이트 봉쇄' 사건을 일으켜 119일의 근신 기간 후 복학한 뒤, "모닝 이렉션 페스티벌, 아침에 서는 축제." (189쪽)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서른 두살의 화자 겐이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흥미로운 지점은 다양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학교라는 지루한 곳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그저 즐겁다는 단순한 이유로,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단 이유로 전공투를 흉내내며 '바리케이트 봉쇄 사건'을 벌여 퇴학 위기에 놓이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하기만 한 겐. 그의 일에 동조하지만 매사에 진지하고 분석적인 아다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와세 등 캐릭터들이 서로 뚜렷하게 대비되는 점이 흥미롭다.
겐은 시종일관 학교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들이 일본의 제국주의에 아무런 의심없이 순응하며 전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고문하고 강간할 이들이라며 비판하고, 지나치게 진지한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일관한다. 겐의 이러한 태도는 '베트남 전쟁 발발, 케네디, 맬컴 엑스, 마틴 루터 킹의 암살, LA흑인 폭동 등이 일어난 1960년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으로 발생한 히피 문화(평화와 자연으로의 회귀, 즐거움을 추구.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감성 중시 등)'(위키백과 해설 참조)의 정신을 빼다 박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지한 아다마 또한 이러한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아래의 대목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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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마는 1960년대 말에 충만하였던 그 무엇인가를 믿고 있었기에 그 무엇인가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무엇인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단일한 가치관에 목 매어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다. (224쪽)
뿐만 아니라 외국의 문화가 일본에 밀려드는 시대였음을 시사하는 대목도 눈여겨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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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마, 문화란 정말 무서운 것이란 생각이 들어."
"왜?"
"이와세 말이야, 만일 일본에 이만큼 외래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제플린도 베를렌도 토마토 주스도 모르고 한평생을 구멍가게 주인으로 보냈을 게 아니겠니?" (201쪽)
이 소설의 또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의 문화, 특히나 히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아침에 서는 축제'에 대한 대목들이다. 이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미인 나가야마를 섭외했다는 이유로 공고의 검도부들에게 폭행을 당할 뻔 한 일을 야쿠자를 매수하여 막아낸 일도 너무 웃기고, 청소년기의 객기가 아니고서야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는 과정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축제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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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들의 패션은 다양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많았지만, 머리카락을 물들이거나 매니큐어, 립스틱, 타이트 스커트, 프리츠 스커트, 핑크색 카디건, 꽃무늬 원피스, 청바지 등 여러 가지였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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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 위에 네글리제를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브란덴부르크협주곡 3번>과 함께 등장한 나가야마 미에는 베니어판과 두꺼운 종이로 만든 사토 에이사쿠(당시 일본 수상. 후에 노벨평화상을 받음-옮긴이)와 린든 존슨과 도쿄대학 정문의 모형을 도끼로 갈가리 찢어놓았다.
시라칸스는 레드 제플린의 <홀 로타 러브>를 첫 곡으로 연주를 시작하였다. 후쿠는 여전히, 돈추노 돈추노를 외쳐댔다. 맨 먼저 춤을 춘 사람은 앤 마가렛이었다. 연극 공연 전에 몸을 풀기 위해서라고, 앤 마가렛은 파란 운동복 차림으로 유방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 흑인 병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것을 신호로 나가야마 미에가 늘 입고 다니는 검은 새틴의 착 달라붙는 슬랙스 차림으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조명을 비추었다. 나가야마 미에의 은빛 블라우스가 라이트를 받고 번쩍였다. 그 빛에 이끌린 듯 천천히 춤의 파도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중략)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253쪽)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열일곱 당시의 친구들이 삼십대 초반이 된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부분을 읽으며, 다시 서두에 했던 질문을 복기해본다. 작가가 삼십대 초반이 되어 열일곱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소설을 썼던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젊은 시절의 무라카미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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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초반이 된 겐과 그의 친구들은 여느 사회인들 못지 않게 이제는 히피의 모습을 벗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렇기에 어쩌면 무라카미 류는 삶이 지루함에 잠식되기 십상인 삼십대를 보내며, 옛 친구들에게 다시금 우리의 유쾌하고 자유분방하고 천방지축이었던 열일곱을 잊지 말라고, 다시금 즐겁게 살아보자고 선동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게 아닐까? 그 옛날에 하고 싶은대로, 두려움 없이 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던 치기와 객기를 왜 잃어버리고 사냐고 물어오는 것만 같다.
나는 사실 소심하고 다소 주눅들어 있는 채로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겐과 그 친구들처럼 이렇게 대범한 일들을 벌여본 역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즐겁게 사는 것'은 나의 삶의 목적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진지하게 사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겐과 그의 친구들이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지루함을 강요하는 사회와 세상에 저항하는 걸 지켜보며 즐겁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했다.
분명한 건 사람마다 '지루함'이 되었든 '부조리'가 되었든, 그것과 싸우는 방식은 한 가지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하, 이렇게 무라카미 류 혹은 겐처럼 유쾌하고 무모하게 싸우는 이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당신은 무엇과 싸우고 있는가?싸움에 대상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서두에 옮긴 작가의 말처럼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싸움이다.' 우리에겐 단지 우리를 계속해서 싸우게 해줄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소설을 통해 누군가는 그러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를!
1969년, 열일곱의 나이로 '아침에 서는 축제'를 벌인 때는 물론이고,
서른두 살 소설가인 지금도 나는 내내 축제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중략)
그것은 아마도 영원히 즐기자는 것이 아닐까?
- 식스티 나인, 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