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공중에 떠 있기는커녕 핸드폰, 이어폰, 충전기, 콘센트 구멍, 스위치, 센서, 뭐 그 밖에 더 많은 것들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너무 붙잡혀 있죠. 각자의 현실들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겠지요. 이제는 개개인이 서로의 현실을 이해하기에는 서로 너무 멀죠. 그 거리가 발 밑에 허공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수 는 있겠습니다.
김엄지 『겨울장면』 125쪽
'R은 8개월 전 미끄러져 5미터 밑의 바닥으로 추락'한 적이 있고 당시에 일행은 없었으며, 그는 '떨어진 그 자리에서 주저앉은 채 맨정신'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길 반복하다, 구조된 것인지 제 발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이후 R의 기억에선 사고 당일의 기억 뿐만 아니라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고, 이에 R에게 떠오르는 어떤 불연속적인 기억의 장면들과 어렴풋한 현실들이 모자이크처럼 이어가는 형식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R은 한순간, 단 한 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겹쳐지는 시간.
R은 갑자기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
(29쪽)
R이 사고를 당한 곳은 아마도 얼음 호수가 되어버린 제인호수에서였다. 그곳에선 사람들이 얼음 낚시를 하기 위해 동그란 구멍이 뚫어놓고 각각 멀찍이 떨어져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종종 깊고 아름다운 제인호수에 몸을 던져 죽기도 했는데, 짐작컨대 R의 지인 L 또한 직장 상사의 인격 모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지 못하고 호수에 몸을 던져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짐작된다. R은 죽은 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그 곳에 갔다가 추락사고를 당한 듯 하다. 이 모든 정황은 정확히 서술되는 대신 짐작해볼 수 있는 힌트들 가운데 희부윰하게 드러난다.
'죄의식'(32쪽)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쩌면 R은 L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제인호수에 간 것일까, 하고도 짐작해볼 수 있다. 아내는 R에게 '우리는 불행하지 않아요', '우리는 아무렇지 않아요'(33쪽)라고 말하며 R에게 현실을 직면시키는 대신 감추어 덮으며 최면같은 위로를 건넸지만, R과 아내는 결국 서로 어긋난다.
소설은 현실인지 R의 의식인지 일부러 혼선을 주는 서술들을 교차시켜나가며, 결국 각자의 현실에 매몰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부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아마도 R이 홀로 제인의 해변가를 걷다 모텔에 묵었던 일은 현실, 아내와 함께 해안가를 걷던 일은 비현실일 것이다. 그리고 R이 진료를 받는 장면은 현실, R은 의사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을 듣는데,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도 결국 그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허공에 붕 뜬 상태로 남겨지는 일 또한 현실이다. L의 죽음, 아내와의 이별이라는 모든 현실은 R에게 버겁고 R은 계속해서 꿈결 같은 무의식의 세계를 전전한다. 현실의 반대편에서 R은 여전히 죽은 L과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고, 아내와도 여러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R은 아내가 아직 생생하고.
(중략)
R이 그렇게 말할 때 아내는 울고 있었던가.
웃고 있었던가.
아내의 표정은 하나로 보이는 두 개의 끝.
R은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김엄지 『겨울장면』 81-82쪽
L의 죽음에 대해 상처받진 않았지만 화가 났던 R. 그가 얼음 호수에 머리를 박고는 죽으려고도 했지만 그를 만류했던 아내. 지금은 떠나고 없는, 오직 R의 상상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아내와 그녀의 목소리. 이 소설은 이런 것들의 모음이다.
R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로 천장만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다가, 자꾸만 천장 안에 무언가, 희망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어 사다리에 올라 천장에 다가선다. R은 "계속 시도하는 것 지겹지 않나요?"(143쪽)라고 묻는 수화기 너머의 아내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그 일을 멈추지 않고, 결국 8개월 전 추락사처럼 천장 가까이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는데, 그는 이미 8개월 전에 허공을 밟는 능력이 생겨 안타깝게도 더이상 죽음을 향해 추락할 수 조차 없다.(144쪽) 허공을 밟는 능력이란 아마도 그가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계속해서 비현실의 세계로 도피하는 능력을 의미할테다. 기억을 일부 잃어버렸기에 가능한 능력인 걸까.
김엄지의 이 독특한 소설은 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R이 허공에 뜬 채, 아득히 먼 바닥으로 추락하지도 못한 채 겨울의 장면 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을 덮은 뒤 몽환적이고 아련한 정서가 남았는데, 조각났던 각각의 장면들이 소설을 덮은 뒤에야 그제서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되어 의미를 던져준다는 점이 자못 신기했다. 뿐만 아니라 문장들이 시어들처럼 응축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어, 읽는 동안 웅숭깊은 감흥을 안겨주었다. 상실이나 몰이해, 현실 도피 등의 주제를 이런 식으로 다룰 수도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