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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 다나베 세이코
  • 13,500원 (10%750)
  • 2020-12-15
  • : 1,643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 '조제, 호랑이,물고기들' 다들 아시죠?

이 영화를 생각하면 츠네오 역의 '츠마부키 사토시'와 조제 역의 '이케와키 치즈루'가 떠오르고, 츠네오가 조제를 업고 있는 장면이 유독 생각나곤 해요. 대체로 뾰루통한 표정의 조제가 츠네오의 등에 업혀 여행을 하던 순간 말이죠. 이번에 원작소설을 읽은 뒤 이 장면을 다시 보니, 비로소 조제와 츠네오의 표정이 보여서 새로웠어요.

이 영화가 개봉했던 2004년 무렵, 서점가에도 한창 일본 소설 열풍이 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 소설엔 영 흥미가 없던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저는, 소설 꽤나 읽는다는 제 친구들 손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라든지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이 들려있는 걸 보고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뒤늦게 2008년이 되어서야 소설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달까요?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일본 소설이 꽤 많이 꽂혀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1985년에 출간된 소설이 2020년의 내게도 와닿는 이유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을 거의 처음 읽는 저는, 이 소설집이1985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당시 다나베 세이코가 우리나라 나이로 58세, 즉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여자인데 서른 즈음이거나 그 시절을 회상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아, 소설을 쓸 당시 작가의 나이가 삼십대였나보다' 하고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환갑을 바라보는 작가가 이렇게 섬세하고 예리하게 남녀사이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건지, 아니 58세였기에 더욱 이런 소설을 잘 쓸 수 있었던 걸까요?

어쨌든 출간된지 무려 35년 가까이 된 이 소설이 전혀 올드하거나 신파적인 면모 없이, 발랄하고 쿨하며 때때로 농염한 연애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솔직히 책 표지가 너무 소녀스러워서 삼십대 중반의 저에겐 좀 비호감이었고, 그러다보니 별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건 웬걸? 앞에 수록된 두편의 소설까지는 그냥 여린 감수성의 소설들이군, 하고 생각했는데 이후부터 정말이지 연애의 다양한 상황과 결을 보여주면서 특히 '여성주도적(?) 연애'에 대한 이야기들이 곧잘 등장해서 흥미로웠어요. 요즘 소설 같았달까요? 그리고 연애 상황에서 여자들이 곧잘 느끼는 마음과 생각을 이렇게나 정확히 말해주는 소설이라니. 남성 작가들은 포착하기 힘든 부분들을 포착해내는 지점이 많아 감탄하며 읽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결혼이 아닌 진짜 연애를 했던 여성들의 연애 이야기

다나베 세이코의 이 소설집에는 총 아홉편의 소설이 담겨있습니다. 연애와 결혼에 대해 알듯 말듯한 상태의 인물이 나오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들이 이제 막 함께 살아내기 시작하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이 묘하게 이십대들의 연애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후 스물 아홉살 여성 화자 우네가 이끌어가는 소설 「사랑의 관」부터는 연애를 하는 이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기 시작해, 이후의 소설들에서는 점차, 삼십대와 사십대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죠.

편집 구성만을 놓고 보면 일종의 연애의 연대기 같달까요. 소설집의 내용과 편집을 생각해보면 소녀스럽기만한 책의 표지가 이를 다 담아내지 못해 너무나도 아쉬워요.

「사랑의 관」에서 스물아홉 우네는 남편에게 결혼 전부터 만나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혼을 하게 되죠. 이후 우네는 안타깝게도 열아홉살 조카인 유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맙니다. '우네의 상냥함에 마음을 놓고, 아무렇게나 몸을 맡겨오는 어린애 같은 유지의 젊음에, 우네는 영문 모를 슬픔을 느낀다'(87쪽)는 대목에서, 우네가 아슬아슬하게 유지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요. 하지만 결국 둘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아버리죠. '다시는 유지와 이런 기회를 갖지 않으리라'(103쪽)며 '사랑의 관'(103쪽)을 묻어버린다고 표현하는 대목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어요. 윤리적으로 둘의 사랑은 허용될 수 없지만 '사랑의 관'이라는 문학적 표현이 이 둘의 관계를 단박에 설명해버리는데서 오는 놀라움이랄까요.

「그 정도 일이야」에서는 서른살의 여성 화자가 바쁘고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남편이 곧잘 부재하는 사이, 호리라는 여섯살 연하의 남성과 데이트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들을 재치있는 화법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남편과 훌륭하게 쇼윈도 부부로서의 역할을 해내가는 장면과 '치키'라는 인형을 매개로 호리와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등이 여느 드라마 못지 않게 재밌게 그려집니다. 읽는 동안 '부부'란, '결혼'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여전히 육체 관계는 이뤄지지만 마음은 서로에게 두지 않는 그런 관계를 과연 '부부'라고 불러도 될까요. 세이코가 포착해내는 이런 딜레마들이 현시대에도 결코 낯설지가 않습니다.「눈이 내릴 때까지」에는 결혼하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이와코라는 여성이 나옵니다. 언제 헤어질지 몰라도,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만족감, 그냥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순간 순간의 만족감에 사로잡힌 여자. "자네는 연속편을 싫어하는 것 같아. 한 번으로 완결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야."라는 대사가 150쪽과 163쪽에서 두번이나 동일하게 나오는데, 이와코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단 몇 문장만으로 설명해버리는 작가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차가 너무 뜨거워」에서는 오래 전 남자친구 부모님으로 인해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진 커플이, 각자 결혼 후 칠년 만에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에요. 현재 방송작가로 상당히 성공한 화자와는 달리 부모님 사업을 물려받았다가 폭삭 망한 요시오카. 옛 연인의 처량한 현주소를 마주해야만 하는 화자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서, 이 소설 또한 퍽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그 외에 여기서 다 다루지 못한 나머지 세편의 소설들도 모두 다나베 세이코 특유의 장점들이 묻어나는 소설들이었어요. 어쩜 이렇게 남녀 관계의 어떤 보편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여러 문학적인 장치들을 통해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들이라 좋았습니다.​

사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이 많이 생각났어요. 문단의 많은 후배들에게 그녀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감히 엿볼 수 있는 소설들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세이코의 이 소설들을 남성 독자들은 어떤 식으로 읽게 될지 궁금합니다. 쿨하고도 농염한 연애, 혹은 농담 같은 치정 사이를 오가는 그녀의 소설은 아마도 남성 독자들에게도 다양한 질문과 여운을 남기리라 생각되네요. 사랑에 대한 치장이나 포장이 없는 세이코의 소설. 여러분도 한 번 기회닿는대로 읽어보시기를 바랄게요.

* 이 책은 작가정신 서평단인 '작정단' 활동을 통해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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