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빌라_백수린
2024년에 [눈부신 안부]를 읽었고, 그 해 북콘서트에 참여했다.
긴장하듯 소곤되고 조곤조곤 작가처럼 말하는 모습에 호감이 갔다.
다음 소설도 백수린이다! 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1년이 지났다.
얼마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맹]을 읽는 데, 역자가 백수린인 게 아닌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역자의 말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다시 백수린이 생각났고, 이번엔 2020년에 출간한 [여름의 빌라]다.
[시간의 궤적]
0. 나(女)는 30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프랑스인과 결혼하고 정착한다.
30대 후반인 언니(女)를 만나 연을 맺고 연이 끊기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가 아이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아이는 언젠가 나의 모국어조차 아닌 언어로 나를 증오한다고 말하고 떠날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여름의 빌라]
0. 나(주아)는 21살 첫 유럽여행에서 30살쯤 많은 당신(베레나)과 한스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
오랜 세월 후 함께 캄보디아의 빌라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부부.
각자 다른 것을 느끼는 여행길. 그리고 편지. 마지막 기억.
"주아, 너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자유가 있단다."
이런 류의 단편소설을 몇 개 읽은 적 있고, 그 때마다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죄책감이라는 종류의 감정에 휘둘리는 타입이라 더 그런 지 모르겠다.
우리는 약소국이었고 피해자....인 데, 였어야 하는 데,
우리도 다른 나라에서 나쁜 행동을 했고, 사과하지 않았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와 다른나라의 관계 뿐은 아니다.
여전히 사람은 사람에게 나쁜 행동을 하고 사과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나쁜 행동을 한 적 있고, 사과하지 않았고 못 했다.
반성조차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는다면, 글쎄....반성만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까?
작은 의미에서 말하면,
실제로 베트남인을 만난 건,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였다.
그 아이는 베트남에서 아주 잘 사는 아이일 테고 밝아보였지만,
한국인으로 그 아이 앞에 서는 것이 처음에는 꽤나 부끄러웠다.
그 아이가 나를 한때는 본인의 나라에 와서 각종 만행을 저지르고 반성하지 않는 나라에서 왔다고 생각할까, 라는 망상이 사라지질 않아서.
태국에 여행가서 가졌던 그 불편한 마음과 죄책감.
단돈 오천원에 겪은 갈등과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언행.
우리는 이제 약소국에서 벗어났으니,
과거 약소국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라고 넘기지 않는 내가 나는 좋다.
불편한게 좋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런 류의 소설을 만날 때마다 베트남 그 아이를, 태국의 그 코끼리를 떠올리는 내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요한 사건]
0. 재개발을 노리고 서울로 입성한 나는 동네친구 해지와 무호를 사귀게 되고,
재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있던 동에네서 고양이 아저씨가 맞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데...
[넌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말들은 끈끈하게 내 발바닥에 들러붙어 어디든 걸을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폭설]
0. 11살이 되었을 때 그녀의 엄마는 이혼을 하고 미국으로 가 케빈과 재혼을 했다.
그 이후로 엄마와의 짧은 만남을 반복하고, 가끔 여행을 간다. 감정을 말하는 건 얼마나 힘든가, 상처입지 않고 과거를 얘기하기란 왜 그리 어려운가.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0. 희주(女)는 아파트 단지 인근 단독주택 중 가장 좋아하는 붉은 지붕의 집에 대한 대화(공상)를 남편과 자주 하곤 했다. 베스트 프랜드인 한나는 레스토랑을 창업하고 희주는 카페 뮐러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가게에서 만난 20대 남자는 현대 무용 발레리노로 좋은 몸을 가졌고, 희주는 자신의 몸을 칭찬하는 그에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붉은 지붕의 집을 부수고 있는 공사장 낯선 인부의 근육에서 무용수의 근육을 떠올리는 데...
나는 이렇게 저렇게 느끼고 그래서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 버렸는 데
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당연하지.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모르는 것이.
그런데도 서운할 때가 있다. 서운하다고 해야 할까...그냥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는 느낌.
그게 서운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아닌 데,
그냥 울컥하고 투명하지 못한 나를 투명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에 억울하고 그럴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다른 느낌을 받지만 공유되어 질 수 없는 마음.
이제 곧 아내가 가장 좋아했던 붉은 지붕의 집은 더 근사한 집으로 변모할 테지만,
아내는 그 집을 좋아할 수 없을 테니까, 그 전처럼은.
그런 마음, 이해할까?
사실 나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해.
[이제 곧 더 근사하게 다시 짓는대]
[하지만 그 집은 그녀가 알던 집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날 오후에 그녀가 보았던 집과도.]
[흑설탕 캔디]
0. 할머니 기일
0. 브뤼니에 씨: 프랑스 살던 시절(내가 13~16살, 20년전) 1층에 살던 키크고 보청기 끼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귀던 그 시절의 연애 이야기
[아주 잠깐 동안에]
회사를 가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차창 밖으로는 공장 지대가 지나가고 근로자들은 각자의 공장을 찾아 내리고 있었다.
짧은 소설을 읽는 데, 배경이 멀어지고 버스가 영원히 운행할 것만 같은 느낌이 받았다.
아...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라는 느낌.
이 문장도 문구도 기억에서 멀어지겠지만, 이 감정만은 오래가겠구나.
리어커를 힘껏 당길 때 떨어져나가던 노인의 몸. 그리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
난 단지 도와주고 싶었을 뿐인 데!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도 마음속에 자라나는 혹시나, 혹시나...
길게 갈 감정임을 눈치채고 불안감에 불안감을 더할 수 밖에 없을 거 같은 그 느낌.
그것이 아주 잠깐 동안의 일일지라도.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청소년기의 성적 충동은 지금 생각하면 가벼운 것이라도 그 때는 대흥분인 것을.
그 때는 SEX라는 단어가 왜 그리 궁금했을까.
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절, 사전에서 찾아봤던 그 단어.
읽어도 이해가지 않던 그 단어.
그래서 계속 관심이 갔던 그 단어. 대흥분의 그 느낌.
[작가의 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아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사전)
사랑스러운 저지레를 친다, 그 나이에 으레 그렇듯이 온갖 저지레를 다 치고 다녔다.
*저지레 : 일이나 물건에 문제가 생기게 만들어 그르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