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는 세계의 온갖 인종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 사람들은 모두 이리저리 막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치이지 않기 위해서 앞을 다투어 뛰어다녔다. 사람들이 그렇게 긴장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자동차는 자동차대로 사정없이 달리고 항구의 배들도 그리고 큰 건물의 지붕 위에 달린 선전물들과 사람들의 마음까지 서두르게 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집중하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세상 같았다. 행동이 민첩하고 강한 자가 생존경쟁에서 승자가 되고, 그렇지 못하고 느릿느릿하며 약한 자는 패자가 되는 그저 난폭하고 매정한 인간들이 사는 곳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울 시간도 웃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146~147쪽)
... 수백 명의 품팔이꾼들은 손수레를 끌면서 자기네끼리 방향이나 속력을 서로 말하기 위해 이상스러운 소리들을 지르며 달렸다. 짐꾼들은 목적지에 도달하면 품삯을 받지만 그 돈으로는 담배 한 갑도 살까말까 하는 박한 노임이었다. 돈이 적다고 짐 주인에게 몇 푼 더 달라고 손을 내밀다가는 어떤 때는 뺨을 한 대 얻어맞는 수도 있고 때로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정수리를 얻어맞는 일도 간혹 있었다.그러면 이 불쌍한 일꾼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서서 도망쳐버리곤 했다. 이 일꾼들은 벌써 직업적으로 귀가 밝아서 어디서 짐꾼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 얼른 알아듣고 손수레를 끌고 좋아서 누가 부르는 쪽으로 달려갔다. 일꾼들은 대부분 상의를 벗고 짐을 끌기 때문에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몸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147~148쪽)
요 며칠 전에 나는 어떤 부인을 한 분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바로 젊은 나이에 영웅적인 애국 행위를 하고 세상을 떠난 너무나도 유명한 안중근 의사의 부인이었다.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의 가장 큰 원수였던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바로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살해됐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물론 일본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그의 가족에게까지도 화가 미치게 되자 이 부인은 조국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부인은 일곱 살 된 딸과 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을 데리고 막연하게 북쪽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 후 안 여사는 10년이나 시베리아 땅에서 방랑 생활을 했고, 성장일로에 있던 일본 세력은 이 가족을 더욱 추적했을 것이며, 혹한과 가난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끊인 날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이 부인도 상해에 오게 되었고 마침내 조국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의사의 부인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결국 한국 남자들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다. 얼굴도 갸름하고 나이는 사십쯤 되어 보이는 이 부인은 내가 회색으로 도배질되어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부인은 "얘가 내 딸이에요"라고 열일곱 살쯤 돼 보이는, 중국 옷차림으로 서 있는 여학생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소개했다. 아들 아이는 소련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아주 튼튼하게 생긴 것이 얼굴색은 더욱 건강해 보였다.(152쪽)
최씨는 내 옆에 서서 비난하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 "지전은 아직 얼마나 남아 있니?"
"한 푼도 없어." 그의 큼직한 눈이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되더니 내 얼굴과 동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자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뭘 열심히 계산하는 눈치였다. "이것 받아둬!" 이 돈 내가 주는 것이니 좀 조심해야 돼. 너는 이제 다른 대륙에 와 있어, 이 철학자야."
나는 그 돈을 받아 접어서 제일 안쪽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되는 안봉근이 콘크리트 방에서 돌아오더니 말했다. "자, 이제 우리 갈 길을 가자, 그럼 정거장으로 가야지." 우리는 모두 파리로 가게 될 다른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형들! 잘 가요." "그럼 훗날 조국에 돌아가서 다시 만납시다."(194~195쪽)
1910년 8월 28일, 일본의 군인이며 정치가였던 데라우치(데라우치 마사다케. 1852~1919. 1910년 당시 초대 조선 총독)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문서가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