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과 단편집으로 유명한 안톤 체호프. 벚꽃동산만 겨우 읽어본 나에게 펭귄클래식에서 내놓은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는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간 말로만 들었던 단편의 대가 체호프. 요즘 과연 고전이란 것이 무엇인지, 고전이 과연 그 가치를 특수하게 인정받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고 있는 나에게 그래도 고전은 고전이다라는 것을 새삼 다시 한번 일깨워준 작품이 될 것 같다.
<사랑에 관하여>는 안톤 체호프의 잘알려진 대표작 몇 선과 그의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꼭 읽어보아야 할 몇 선의 작품을 잘 혼합해 놓고 있다. 특히 그의 초창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굴'과 '진창', '구세프'는 그간 잘 소개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 중 왜 이 작품들이 꼽혔는지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로 배치된 '굴'은 그 순서와 내용 모두 의미가 깊다.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구걸을 하러 돌아다니는 와중에 아들이 '굴'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다. 아이는 굴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다가 결국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과 관음증으로 인해 굴을 먹게 된다. 역시나 현실은 굴과는 전혀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아버지는 아픔에 헛소리를 하고 있다. 어찌보면 큰 내용없이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체호프는 자신이 바라보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찐득한 어둠을 너무도 잘 그려내었다. 그리고 이 '굴'이 첫번째로 소개되면서 독자들은 이 <사랑에 관하여>가 어떤 느낌의 책일지 그 진정한 맛을 이미 확실히 자기도 모르게 인지한 후에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후 책은 '굴'을 제외한 8편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 체호프의 스타일과 내면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체호프는 별다른 일 없이 벌어지는 이야기들과 그 안의 인간의 짐작할만한, 그러나 딱히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의 내면과 심리,본성에 대한 이야기속에서 그 개개인의 특성이 아닌 사회와 인간의 특성에 대해서 너무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에 관하여'는 이러한 것을 가장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깨버리고 싶지만 결국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소시민의 모습, 소시민이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깰 수 없는(사실 깬다고 특별히 변할 것 같지 않다고 해도 깨지 못하는 것들)현실의 보이지 않는 벽과 그에 대한 소회를 통해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만 그 모습을 통해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닌, 인간에 관한,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다. 결국 '사랑에 관하여'는 '사랑'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인간'과 인간들이 모인 '사회'의 속성에 대히 보여주고 있다.
체호프가 보여주는 현실은 상당히 우울하다. 소설속의 주인공들과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거나, 잘못된 욕망에 탐닉하거나, 결혼생활에 실패했거나, 정신병등의 질환을 앓고 있다. 또한 그들의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결국 '예정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계속 가난하며, 진창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고 새로 찾은 사랑에 대해 확고한 결말을 짓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래서 더욱 우리는 체호프의 소설들을 떠받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우리는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와 세상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 체호프의 예리함은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스스로의 벽앞에 좌절하고, 일은 꼬이기만 하며, 가끔 헛된 진창과 같은 욕망에 빠져 허우적댄다. 체호프는 100년 전에 이미, 우리가 100년 후에도 이럴 것을 알고 있었다.
ps 보통 책의 구성과 편집에 인색한 내가 이 책의 구성은 칭찬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사랑에 관하여>는 이런 체호프의 시선을 너무도 잘 담아내고 있다. 특히 각 9편의 단편들이 너무도 적절히 잘 배치되어있다. 특히 처음에 '굴'을 배치하고 마지막에 '개를 다니고 다니는 여인'을 배치한 편집자의 센스는 안그래도 빛날 체호프의 단편들을 더욱 찬연하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