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께에 비해 수월하게 읽힌다. 아마 자극적인 배경과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되지 않는 전개가 한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킨'과 같은 타임슬립물은 SF장르가 아니라 역사소설로 분류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전에도 한번 적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온갖 애매한 것들이 SF라는 장르에 묶여있어서 책을 펼치기 전까지 어떤 전개를 따라가게 될지 제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주전쟁, 메타버스, 좀비, 타임슬립, 판타지, 초능력... 등등이 SF라는 이름으로 잡탕찌개마냥 묶여있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솔직히 완전히 다르잖아...
어쨌든 '킨'은 최근에 걸렸던 '활자를 읽지 못하는 병'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숨막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는 아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술술 읽히고 전개가 향해 가는 끝이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킨'은 SF의 탈을 쓴 역사소설에 가까운데 주인공이 시간이동을 해서 과거로 가는 것 빼곤 SF적인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왜 타임 슬립을 하게 되었는지,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등등 그런 SF적인 요소에는 설명이 전무하다. '시간 이동'이라는 소재가 과학적 상상력보다는 과거 1800년대 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는 느낌이 강하다.
1976년대를 살아가다가 갑자기 1815년으로 빨려들어가버린 주인공은 어쨌든 그당시 흑인 노예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지만 점점 그 노예제도에 순응하고 익숙해져간다. 그 모습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가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의 정신은 현실과 고통에 얼마나 취약한지 정말 날것으로 드러내기에 아주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인간의 잔인함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데, 노예제나 홀로코스트, 일제강점기 등이 산발적으로 떠오르면서 인간이란 얼마나 잔인한지, 그리고 그런 잔인성을 억누르고 소위(반어법적인 느낌을 주지만)'인간성을 갖춘'이라고 하는 그런 사회화된 인간을 만드는 데 사회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자꾸만 곱씹게 된다.
주인공이 고통에 굴복하고 스스로를 노예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나 자신이 떠오르기도 했다. 평등하다고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본인을 차별하는 차별적 제도에 순응할 수 있나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의 첫 발자국만이 굴욕적일 뿐, 발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굴욕의 치욕스러움은 옅어져가고 현실의 안락함이 어떻게 사람을 중독시키는가, 어떻게 사람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의 의지를 꺾는가를 나는 이제 잘 안다. 지금의 나는 잘 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