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잔인한 정당이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차별을 앞세우며 차별을 공고히하는 정당이 있다. 내가 특히 궁금했던 점은, 차별을 공고히 하면 할 수 록 피해를 입을 사람들이 왜 그러한 정당을 지지하는가였다.
미국의 경우를 바탕에 두고 서술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부분 한국의 정치상황에도 맞아떨어져 읽는 내내 놀라웠다. 그러니까 보수로 지칭되는 공화당-또는 한국의 보수당(사실 그 정당은 보수당이라고 할 수도 없고 친일매국정당에 가깝지만)-은 차별을 공고히하고 소수의 가진 자들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런 수치심의 윤리에 젖어든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에서 처한 위치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지배논리와 차별논리에 젖어들어 그들을 지지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마치 우월해진 것 같은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들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데 정작 자신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은 민주당이 내놓은 정책 덕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지 못하고 투표날마다 반대정당을 찍는다. 무식은 죄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도 진실을 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도 죄다.
또한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세금을 소량 깎아준다는 이유만으로 적색당을 찍기도 한다. 내 손안에 한두푼 아끼려고 나라가 침몰하든 말든 예산이 거덜나든 말든 나만, '나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 정당을 지지하는 자들의 특징은 '나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나만 생각한다. 나같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다수가 되었을 때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참담한 시민의식의 결여이자 머리통이 텅 비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손안의 이익, 눈앞의 이익만을 곱씹고, 당장 내손안에 사탕 하나 더 쥐여지는 곳에 죽자고 쫓아다닌다. 이런 인간들이 나라의 절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다. 통탄스럽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런 이들을 데리고 현재까지 온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저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자본주의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자본주의의 으뜸 가는 철학적 옹호자였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벌써 이 경제 체제의 결함 하나는 수요 공급의 법칙으로 말미암아 실업률이 높은 경제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고용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야 ‘노동 비용‘, 곧 고용자가 사람들이 고용자를 위해서 일하도록 설득하려면 지급해야 하는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 P75
지난 세기 동안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가 보여준 경제 성적표를 비교하면 우리는 적어도 그들의 집권기가 폭력 치사 발생률에 끼친 영향 만큼이나 성적이 극과 극으로 갈림을 확인할 수 있다. 공화당은 번영을 가져오는 당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 장에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공화당은 지난 한 세기 내내 실업의 규모와 지속도, 경기 위축(경기 후퇴와 불황)의 빈도와 깊이와 지속도,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하나같이 높였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의 격차가 커졌음을 뜻한다.- P76
수수께끼는 바로 이것이다. 무슨 수를 썼기에 인구의 1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수의 부자가 인구의 99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에게 명백히 불리한 쪽으로 돌아가는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다수를 설득했단 말인가? 상대적 빈곤을 키우는 정당을 지지하도록 다수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해 공화당이 내놓은 해법은 중하류층과 극빈층을 이간질해서 내 지갑을 얇게 만드는 주범이 상류층(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초점을 흐리는 것이었다.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과 티격태격하는 한, 이 두 집단은 부자들을 상대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구를 소수의 최상류층과 절대 다수의 어려운 사람들로 양분하는 사회 경제체제를 상대로 싸움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P98
살인율 증가가 어떻게 인구의 못사는 99퍼센트를 갈라놓아서 잘사는 1퍼센트한테 유리하게 작용할까? 답은 간단하다. 우리 법이 범죄라고 규정하는 폭력의 대다수는 가난한 사람이 저지르므로, 폭력 범죄가 늘어나면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저소득층에게 공포와 분노를 느끼면서 정작 나라 전체의 재산과 소득을 대부분 가로채는 것은 상류층이라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P101
자부심의 반대는 겸손이고 겸손은 순결의 필수 조건이므로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겸손을 가장 높은 미덕의 하나로 꼽는다. 반면에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겸양을 자기 모욕에 맞먹기에 가장 몹쓸 악덕으로 본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로 생겨나는 한 가지 결과는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누르고 겸손을 품는 길의 하나로 사회적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하고, 반대로 수치심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부심을 끌어올리고 자신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누그러뜨리는 길의 하나로 사회 경제적으로 우월한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죄의식의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고 수치심의 윤리에 젖은 사람은 강자(‘초인‘을 앞세우면서 예수의 ‘노예 윤리‘에 맞서 ‘주인 윤리‘를 역설한 니체도 수치심의 윤리를 부르짖으면서 후기 저작에서 자신은 ‘적그리스도‘라고 밝혔다)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성향이 강하다.- P133
수치 문화는 계급 구조만이 아니라 신분 구조를 만들어내는 보편적 경향이 있다. 신분 구조는 훨씬 엄격하고 침투하기 까다로워서 계급 구조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사회적 상승 기회밖에 주지 않는다. 낮은 신분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다른 방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신분 위계 안에서 정해진 자리를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남부의 수치 문화에서 가장 낮은 신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고 서부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이민, 특히 멕시코계 미국인의 이민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은 이런 수치 문화의 신분 경합이 펼쳐지는 원형 경기장이다. 그러나 주제는 늘 똑같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부심을 느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같은 인구 집단에 있는 일부 사람들을 어떻게 열등한 존재로 몰아가면서 업신여기고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는가다. 대대적인 ‘버본전략‘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폭력을 낳는 방안이기도 하다.- P169
한편 수치심에 휘둘리는 인격은 수치 문화를 재생산한다. 다시 말해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열등함의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정책을 내놓는 공화당 행정부를 재생산한다. 그러니까 공화당을 찍는 유권자가 꼭 살인이나 자살을 더 많이 저지르지는 않더라도 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남미계 또는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특정 인구 집단을 열등한 사회 신분으로 몰아가서 과도한 모욕을 퍼부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그렇게 해서 살인율이나 자살률, 혹은 둘 다를 끌어올리는 사회적 위계 구조를 만들어낸다.- P171
수치심이나 죄의식이 꼭 병원균이라는 말도 아니고 수치심이나 죄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 언제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앞으로 해내야 할 일은 교도소 안에서도 밖에서도 폭력이라는 파괴적 행동이 아니라 교육이나 뜻깊은 일처럼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수단을 계속 내놓아서 수치심을 줄이고 자존감을 높이는 데 필요한 도구와 자원을 모두가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P184
이 책에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부표와도 같다. 이 부표들은 바닷길의 종착점이 낙심한 개인이나 살인자의 가슴이 아니라 백악관과 두 주류 정당의 상이한 경제 정책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으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P215
같은 맥락에서 21세기에 우리는 자살, 살인이라는 전염병을 막고 다스리려면 그런 전염병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불평등, 치욕, 절망이라는 병인을 줄여서 청결한 정치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런 위험 요인에 이미 노출된 사람들을 치료하거나 처벌하는 데 우리의 한정된 자원을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배울 필요가 있다.-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