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풀잎은 노래한다
나이 든 정착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를 우선 이해해야만 한다." 이 말에 담긴 뜻은 ‘원주민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배워라. 배우기 싫거든 떠나 버려. 우린 너희들이 필요 없으니까.‘하는 의미가 그 밑에 깔려 있다.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 인간 평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 원주민들이 받는 대우를 목격하고 처음 일주일 정도는 충격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흑인 원주민들이 마치 소나 말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걸 듣고 보고 느끼면서 그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경악한다. 흑인 원주민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기에 놀라움이 더욱 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담하고 있는 사회체제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27
왜냐하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피부색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생활한다는 것은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남아 있기를 원할 경우, 많은 것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중간중간 사물을 명확히 보고, 찰리와 경사의 태도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체를 방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백인 문명‘임을 깨닫게 될 순간이 몇 차례 있을 것이다. 백인 문명. 백인이,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탄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P40
진실이나 어떠한 다른 추상적 실제를 위하여 자신의 자화상을 파괴한다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이다.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줄 또 다른 자화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메리의 자화상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또다른 자화상을 만들어 내기에는 적합치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의 부담 없고 격의 없는 친분이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을 진짜 쓸모없는 여인이라도 된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동정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메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심정을 느꼇다. 마음속이 공허하고 텅 빈 것 같았고, 마치 이 세상에서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 이러한 공허감 속으로 근원을 알 수 없는 크나큰 불안감이 엄습해 들어왔다.- P72
‘훌륭한‘ 국립학교 교육을 받았고 문화인으로서 극히 안락한 생활을 부끄럽지 않게 향유해 왔으며 저속한 소설책만을 읽은 덕택에 알아야 할 것은 전부 알고 있었던 삼십 세의 노처녀 메리, 그녀가 지금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렸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남 얘기 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만 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마구 휘청거렸던 것이다.- P73
그러나 문득, 자신이 도망가서 옛날 생활로 돌아가는 것을 가로막거나 방해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주춤하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결혼이 깨져 버린 것에 대해서 어떤 말을 늘어놓을까? 친구들과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 기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현실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자신의 보수적인 윤리관이 다시 되살아났다. 결혼에 실패한 여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친구들을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자 메리는 기분이 상했고 소름마저 끼쳤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가슴속 깊은 곳에는 ‘메리는 뭔가 모자라는 여자‘라고 말했던 친구들의 모습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서 열등감 비슷한 것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P171
그러나 그에게 경찰에 신고를 할 수 있다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메리를 미치게 했다.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일꾼들을 다룰 수 있어야 할 백인 농부의 자연 발생적인 권리에 참견을 한 감상주의자들과 이론가들(그녀는 이들 법률 제정자들과 공무원들을 인간 이하로 생각했다.)이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P209
그러나 자신의 분노와 히스테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 따지고 보면 그녀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고려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흑백, 주종의 공식적인 유형이 개인적인 관계에 의해서 깨지는 일밖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백인은 우연히 흑인 원주민의 눈 속에서 인간적인 면(백인은 이것을 가장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을 보았을 때, 죄책감을 거부하려는 의지와 갈등을 일으켜 분노로 폭발되고, 그 결과 채찍을 휘두르곤 한다. - P248
그는 남아프리카 백인들의 첫 번째 규율, 즉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깜둥이들이 자신이나 너희나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사회의 가장 강한 동감대가 찰리의 목소리를 통해 나온 셈이어서 리처드는 거절 할 여지조차 없었다. 따지고 보면 리처드는 평생을 시골에서 지낸 셈이었고, 갖은 수모를 다 겪었으며, 스스로도 다른 백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찰리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찰리는 농장을 포기하라고 하는데, 리처드에게는 삶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P306
토니는 불행해 보이는 리처드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비극조차 낭만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객관적 입장에서 그 비극은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는 농업의 자본화 증대에 따라 소농이 대농이게 필연적으로 흡수되는 현상의 증표로 보였기 때문이다.(자신은 대농이 될 생각이었기에 그러한 경향 때문에 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토니는 지금까지 직접 밥벌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추상적인 틀 안에서 생각했다. 예컨대, 인종차별 폐지에 대해서 습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사리사욕과의 갈등에서 거의 살아남지 못하는 이상주의자들의 피상적인 사고방식이었다. - P311
완전한 혼란 속에서 벗어나면서 토니가 천천히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는 내내 메리를 주시했는데, 대다수 백인들에게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의 목소리 같은 ‘이 나라‘라는 말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농장밖에 없었다. 아니, 심지어는 농장이 아니라 오로지 이 집과 집 안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메리가 리처드에게 그토록 냉담한 이유가 점차 이해되면서 동정심이 솟구쳤다. 자신의 행동과 상충되는 모든 것들, 그녀가 따르도록 압박을 받아 온 규범을 재생할 만한 모든 것들을 완전히 단절해 버린 채 지내 왔던 것이다.- P319
그때는 그와 결혼하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마침내 구원이란 없으며 죽을 때까지 농장에서 살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지금과 같은 공허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의 죽으에도 새로운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하나도 낯설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