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줌의 먼지와도 같은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에 매달려야, 아니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가?
아무래도 1930년대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등장인물들의 도덕관념이 상당히 박살나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는데 누가 봐도 부도덕적인 상황(예를 들면 불륜)이 굉장히 쉽게 용인되고, 그것을 건조하게 전달하는 문체가 그 자체로 굉장히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느낌을 준다. 신파는 없고 그저 사건의 전개만 존재할 뿐이다. 어떤 비참한 일을 마주해도 주인공들은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비극은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축소되어버리고, 그래서 상황의 아이러니함은 더욱 극대화 된다.
얼핏 보면 주인공인 토니가 제일 멀쩡해 보이지만...사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결함되어 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토니는 오히려 사건의 원인이 된 여자의 안위를 신경쓰고, 마찬가지로 비보를 들은 브렌다는 그 순간 불륜남의 건강을 염려한다. 불륜남인 비버는 자신의 애인에는 관심이 없고 애인의 인맥과 명성을 등에 업고 상류사회에 얼굴을 내비칠 기회만 노리며, 토니의 절친이라던 조크는 마지막에 혼자가 된 토니의 부인, 브렌다와 결혼해 버린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읽다 보면 참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전후사회에서 그동안 소중히 여겼던 가치관과 삶의 붕괴를 겪었기에 이렇게 인간사회를 냉정히 묘사하게 된 것일까?
기묘한 지점은 소설의 후반부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어 토니의 정글 탐사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전개 중심으로 설명하던 나레이션도 갑자기 후덥지근하고 빽빽한 정글에 대한 묘사로 페이지를 채워나간다. 결말은 가히...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까스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토니는 고립된 정글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책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미치광이) 토드에게 잡혀 평생 찰스디킨스를 읽어주며 살아야 할 운명을 맞이한다... 정말이지 마지막 장면은 스릴러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토니가 탈출의 꿈에 젖어 방심해 있을 때, 토드는 독한 술을 토니에게 먹여 이틀간 잠재워버리고 그 사이에 토니를 찾으러 온 사람들은 토니를 만나지 못하고 토드로부터 토니가 죽었다는 소식만 듣고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면 두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번째로는, 작가는 왜 이런 결말을 썼을까 하는점이다. 본인의 결혼생활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던데, 부인의 외도로 본인의 결혼생활이 망가지는 것을 목격한 후 그냥 미지의 곳 어디에서 생을 끝내고 싶은 마음을 소설 속에 녹여낸 것일까? 진짜 후반부는 묘하게 생동감이 도는데 알고 보니 작가가 언젠가 오지에 고립되었을 때 적었던 기록을 토대로 풀어낸 것이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토니이다보니 토니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의 패착을 꼽아보자면 아무래도 지나가버린 유산에 너무나도 집착을 한 것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그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내온 헤턴 저택에 굉장히 집작하며 수입의 상당부분을 그저 저택을 유지하는 데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입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브렌다는 런던에 가려면 가장 저렴한 날의 3등석 기차를 타야 하는 등 그다지 윤택한 삶을 살지 못한다. 브렌다는 헤턴 저택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며 시골 생활을 지루해 하지만 토니는 자신의 삶에 너무나 만족하고 심취한 나머지 부인의 그런 고충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렇게나 집착하던 헤턴저택이라는 지난날의 유산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브렌다가 떠난 후) 토니에게 삶의 충만함도 안겨주지 못한다. 이런 덧없는 느낌은 소설 결말 부분에서 극대화되는데, 대관절 밀림 오지에서 고립되었을 때 영국의 대저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두번째 의문점은 브렌다가 사랑하던 아들과 브렌다의 불륜남의 이름이 똑같이 "존"이라는 점이다. 소설이 작가가 인위적으로 구성한 세계임을 감안할 때, 둘의 이름을 똑같이 지은 것은 작가의 어떤 의도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둘 다 소설 속에서 브렌다가 (유일하게) 사랑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끔찍하다고 여기는 헤턴 저택에서 브렌다는 아들인 존만 보고 살아가다가, 비버와 우연히 마주치고나서는 비버를 좇아 헤턴저택을 거의 찾지 않는다. 아들 존만이 가장 소중했던 삶이 불륜남 존 비버가 가장 소중한 삶으로 옮아가버린것이다. 아들의 비보를 들었을 때, 브렌다는 하루종일 불륜남 존의 건강을 걱정하다가 그가 무사한것에 모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의미 없이 그렇게 지은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었고, 무척이나 몰입감 있게 읽었다. 재미있는 소설을 마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근래 드문 만족스러운 여정이었다.
"브렌다 부인은 신중하지 못하신 것 같군요. 국왕 대소인(代訴人)이 개입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게다가 돈 문제도 있고요. 현재 합의 내용에 따르면, 브렌다 부인은 죄가 없는 피해자이기 때문에 법정에서 라스트 씨에게 상당한 금액의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은 아시는 거지요?"- P199
인디오 남자 한 명은 총신이 하나인 전장식(前裝式) 장총을 갖고 있었고 다른 몇 명은 활과 화살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두른 붉은 무명천을 제외하곤 완전히 알몸이었다. 여자들은 지저분한 옥양목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오래전에 어느 순회 설교자가 나눠 준 것을 이럴 때 입으려고 간직해 두었던 듯했다 그들은 어깨에 버들고리를 지고 거기에 달린 끈을 이마에 걸어서 무게 분담을 줄였다. 무거운 짐은 모두 여자들이 이 바구니에 담아서 운반했다. 거기에는 그녀들과 남편들이 먹을 식량도 포함돼 있었다. 거기다 로사는 포브스 씨와의 친교의 유물인, 찌그러진 은 손잡이가 달린 우산까지 챙겨 왔다.- P270
마침내 그는 탁 트인 공간에 들어섰다. 그의 눈앞에는 문이 여러 개 있었고 그의 도착을 축하하는 트럼펫 소리가 성벽을 따라 울려 퍼졌다.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보루에서 보루로 전해져서 마침내 나침반의 네 끝 점에 이르게 되었다. 아몬드 꽃잎들과 사과 꽃잎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꽃잎들은 여름 폭풍우가 지나간 뒤 헤턴의 과수원에서처럼 온 길을 뒤덮었다. 금박을 입힌 큐폴라와 설화석고로 만든 첨탑들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앰브로즈가 알렸다. "여기 그 도시를 대령하였나이다."-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