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을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구체적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후위기와 저출산을 동시에 떠들어대는 사회 속에서, 나는 양측의 메워지지 못할 깊은 골을 느끼곤 한다. 참 재미있는 점은, 기후위기를 더 걱정해야 될 것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고, 상대적으로 관련이 덜한 사람들만이 목청높여 소리치고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기에, 자녀가 있는 사람들 또는 자녀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고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이들은 누구보다 무관심하다. 저출산의 위험을 논하고, 싱글세를 주장하는 이들은 아예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같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해마지않는 자녀가 살아갈 삶이 걱정되지도 않는 걸까? 아니면 과학자들이 무슨 초능력이라도 부려서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믿는 걸까?
그런 것 같다. 기후위기에 대해 사람들과 몇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미래에 누군가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아니 기대라기보단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기후위기 문제를 마치 남의 문제처럼 치워버리고 있었다. 참으로 우수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하찮은 탈모 문제조차 극복하지 못한 과학이 무슨 수로 전 지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것은 전지구적인 협력이 전제되어야하는 데다가, 삶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하는 어마어마한 일인데 말이다. 현실은 영화 '돈룩업'보다 더 답답하고 잔인한 것이다. 현재 자신의 삶만 신경쓰면 되는 무자녀 싱글들이 기후위기에 대해 목소리 높이는 것을 보면 답이 없는 현재 상황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2023년 IPCC 6차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전문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대로라면 2040년 이전에 지구온도가 1.5도 상승할 것이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우리는 1.5도선을 제지하지 못할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해 알면 알 수록, 책을 더 찾아보면 찾아 볼 수록 어쩔 수 없이 단념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지금 당장 경종을 울리는 수많은 책과 뉴스에도 변하지 않는, 아니 변하더라도 너무 느리게 변화하는 사회에 있다. 작년, 빌게이츠가 쓴 'How to avoid climate disaster' 이란 책을 읽었다. 책은 코로나때 쓰였고, 서두에서 빌게이츠는 기후재앙을 피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매년 배출중인 온실가스 50억톤을 당장 0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절반도 아니고 0이다. 50억톤이 말이다. 그리고나서 몇 년이 지났고, 미국은 트럼프가 집권하고 한국은 윤석열이 집권했다. 기후를 위한 정책은 뒷전이 되다 못해 음모론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미국 대선 열기가 뜨거운 지금, 미국은 트럼프의 재집권을 앞두고 있다...
사실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지 모르겠다. 아니 지금은 희망을 찾을 때가 아니라 단념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죽는 시점이 조금 앞당겨지고, 조금 더 고통스럽고, 조금 더 구체화 되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말을 눈앞에 둔 지금, 미래에 대한 큰 꿈 없이 그저 하루하루 한번 더 웃고 한번 더 즐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부디 내 끝은 평화롭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