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바다에서 오랜만에 허우적 거리면서 헤엄치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책장을 넘기는 내내 의무교육과정에 국영수처럼 과학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분개와 내 처참한 교양과학 지식 수준에 대한 절망이 번갈아 찾아왔다.
유전자에 대한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이기적 유전자'였으니 말 다했지... 그동안 매체를 통해 가볍게 유전자를 접하면서 나는 은연중에 키가 크게 하는 유전자, 공부를 잘하게 하는 유전자 같은 것들이 거의 일대일 매칭으로 존재하는 줄 알았다. 거기에 더해 '표현형'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해보아서 그제서야 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다음 책이 '확장된 표현형'이었는지 간신히 이해하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생물학자 치고 책 제목을 감성적으로 잘 짓는군, 하고 생각했었다.)
이 책의 한장 한장이 내 무지를 깨주는 지식의 불빛이었으며 확실히 이 책을 읽기 전 나와 읽은 후의 나는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번 독서를 통해 DNA의 메틸화, 히스톤의 아세틸화 등 새로운 용어를 배운 것도 큰 수확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유전자가 사람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유익한 부분이었다. 유전자의 발달은 굉장히 복잡한 매커니즘이며 처한 맥락과 경험에 많은 영향을 받는 다는 것...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간략화 해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그렇지 않다. 사건을 간략화 해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현실의 왜곡도 상당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투브에서 유전에 대한 한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아들을 낳은 일부 모체의 뇌에서 y 염색체가 발견 된 것에 대한 내용이었고 그것은 임신을 하게 될 경우 남편의 염색체가 모종의 매커니즘을 통해 임신한 산모의 bbb를 뚫고 산모의 신체에 염색체가 일부 남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회수를 뽑기 위함이었겠지만 제목도 제목이거니와 해당 분야 교수가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래서 남자를 잘 만나야 된다는 등, 이래서 아들을 낳은 엄마가 남자처럼 변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전의 생물학적 지식이 전무한 멍청한 나였다면 그 이야기에 십분 공감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기본적인 유전자의 작동에 대해 이해하게 된, 이제는 약간의 상식을 갖춘 나로선 고작 염색체 하나로 인해 표현형을 넘어선 사람의 가치관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너무 경악스럽게 다가왔다. 아무리 대중이 멍청하기로서니 저렇게 약을 팔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도 그 우매한 대중 중 하나였는데! 심지여 아직도 상식의 많은 부분에 구멍이 나 있어 나도 모르는 새 경도당하고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다시금 값진 책은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전해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고 돌아보게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살면서 이런 책들을 마주치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지은이 데이비드 무어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수월하게 한국어로 습득할 수 있게 해 주신 정지인 님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만약 우리가 염색체를 이루는 DNA 뭉치에서 끄트머리를 붙잡고 한 가닥 뽑아 올린다면, 이 가닥은 엉켜 있는 털실 뭉치에서 뽑아 올린 2합사 털실처럼 미끈한 일직선 모양이 아닐 것이다. 뽑혀 나온 DNA 가닥은 실패 같은 것에 단단히 감겨 있는 것처럼 뭉친 마디가 보이고, 그런 다음 이어지다가 다시 또 그런 꼬이고 뭉친 마디가 수없이 반복되는 형태일 것이다. 이 ‘실패‘는 다른 커다란 분자들 몇 개가 모여서 만들어진다.- P82
DNA 가닥이 둘둘 감겨 있는 이 ‘실패‘는 히스톤이라는 큰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히스톤 역시 단백질이며, 여덟 개의 히스톤이 모여 하나의 ‘실패‘를 이룬다. - P83
염색체가 DNA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염색체 안에는 DNA 외에 히스톤이 함께 존재한다. 실제로 염색체를 이루는 ‘물질‘, 즉 염색질에는 DNA보다 두 배 많은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단백질은 주로 히스톤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행동 후성유전학 연구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염색질 중에서도 DNA가 아닌 이 분자들이다. 염색체의 비DNA 요소들은 실제로 우리의 DNA, 다시 말해 유전자와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있으므로, 글자 그대로 ‘유전자 위에 있다‘라는 의미에서 후성 유전적이다.
- P83
몇몇 종류의 경험은 사람에게 분명히 후성유전적 영향을 준다. 아동 학대 경험은 GR 촉진유전자와 세로토닌 수송체 촉진유전자의 메틸화 증가에 영향을 미치고, 태내에 있을 때 가정폭력에 노출된 것은 GR 촉진유전자의 메틸화 증가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중략) 이 모두를 종합해볼 때 드러나는 증거는 다양한 사회적 스트레스 요인이 우리의 후성유전 상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그 영향이 때로는 수년간 지속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P196
이러한 부계 연구에서는 경험의 효과가 아비의 정자를 통해서만 새끼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포유류 수컷은 태아를 배고 있지 않고 따라서 태아에게 출생 전 환경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연구가 몇 건 이루어졌는데, 그중 한 연구에서 실험자들은 교배하기 전 달에 수컷 생쥐에게 특정 음식을 뺀 먹이를 먹였다. 이 먹이 조작은 새끼들의 혈당 수치가 비정삭적으로 낮아진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 발견은 아비의 영양 경험이 정자의 후성유전적 리프로그래밍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에 따라 새끼의 태아기 환경과 관계없이 새끼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P327
특히 언론은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특정 질병 상태나 작은 키 같은 표현형을 독자적으로 초래할 수 있다고 암시함으로써 후성유전적 결정론으로 슬그머니 빠져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식의 글은 수십 년 동안 생물학에 들러붙어 있던 "한 표현형을 담당하는 유전자"라는 식의 착각, 즉 특정 표현형을 지시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가정과 똑같은 착각을 영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글들의 유일한 차이는 ‘유전자‘ 대신 후성유전적 성격이 가미된 ‘유전자 스위치‘라는 단어를 쓴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키 같은 특정 표현형이나 질병은 유전자나 유전자 스위치 같은 단 하나의 요인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시스템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 간 상호작용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생한다...(중략) 표현형의 발달은 후성유전적 표지가 (물론 다른 발달 관련 요인들과 함께) 속해 있는 맥락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P363
교훈1: DNA 혼자 형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형질들은 유전과 후성유전, 환경이라는 다양한 요인들이 통합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작동하며 상호작용한 결과 발달한다. 형질은 단 한 가지 요인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존재다. 발달과학자들은 수십년 전부터 유전자 결정론이 발달의 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잇었다. 오히려 우리가 현재와 같은 존재인 것은 우리의 발달기 동안 조상에게 물려받은 다양한 자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때문이며, 발달이 일어나는 맥락도 그 자원의 일부다. 맥락에는 우리가 수정될 당시 부모에게서 받은 유전자 이외의 생물학적 요인들 그리고 삶을 영위하는 문화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도 포함된다. 이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스스로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착각을 몰아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이다.- P407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발달하는 동안 속해 있는 맥락에서 심층적인 영향을 받으며, 어느 정도는 그 맥락을 통제할 힘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줄 알고 깨어 있으며 성취하는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책임이 있다. 후성유전학의 위상이 높아지면 모든 이에게 이런 메시지가 전해질 것이다. ‘당신이 생물학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분투하라. 아이들을 주의 깊게 보살피고 돌보아라. 환경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구축하며, 지속적인 건강과 발달을 증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가라. 중요한 건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P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