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들의 기가 줄곧 사경을 헤메고 있다는 구절을 트위터에서 보고 흥미가 생겨 읽게되었다.
아무래도 에세이다 보니 읽기가 수월하고, 전반적으로 2030 한국 여성이라면 충분히 동의할 만한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적혀있다.(비록 작가는 마흔인 것 같지만 말이다.)
머릿말에서 제시한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는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꽤나 신선했고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깊은 문장이 아닐까 싶다.
로맨스... 여자에게 로맨스란 참으로 가슴설레면서도 위험한 단어가 아닐까. 여성작가가 여성의 취향에 맞 예도록리하게 가공해 낸 로맨스 드라마를 보고 자란 우리 순진한 여성들은 나이불문 픽션에 등장한 상상 속의 남자 주인공이 현실에도 있으리라 헛된 희망에 젖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때야말로 여성의 생존과 앞으로의 남은 삶, 그리고 그의 인격이 명재경각에 달려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넘어가느냐가 앞으로 그 여성의 삶을 좌지우지 한대도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남자 하나 잘못 만나 인생이 뒤엉켜버린 여자의 이야기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사실 '뒤엉켰다'는 굉장히 순화된 것으로 현실에서는 폭행, 성폭행을 넘어 본인의 목숨 뿐만이 아니라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협받기 일쑤다. 하루에도 수십 건씩 남자에 의해 살해당한 여자들의 뉴스가 쏟아지는 이 순간에도 로맨스를 담은 콘텐츠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또 그렇게 순진한 여자들을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로부터 눈감게 만든다.
모친이 항상 남자를 만나라고 할 때, 그래서 남자를 만나야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과바구니였다. 독사과가 가득 든 사과 바구니. 연애할 남자를 고른다는 것은 그 안에서 독이 들지 않은 사과를 찾는 것이었다. 겉모양만 보고 말이다.
여전히 나는 연애와 결혼이 여자의 인생에서, 아니 여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견고한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남자를 만나 연애와 결혼을 하고 정상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내 안의 자아와 신념을 꺾고 굴종을 맛본다는 것을 뜻한다. 꺾이는 자아와 굴종의 정도는 내가 함께하기로 고른 남자의 수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신중하고도 신중해야 할 이 순간에 여자가 그릇되고 섣부른 판단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도처에 깔려있다. 로맨스로 한껏 포장한 매체 뿐만이 아니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위계를 상정하는 모든 것들, 남자의 실수와 폭력을 용인하는 주변인의 말들(예를 들어 남자는 애 아니면 개 라던가, 남자는 커도 애 라던가 하는 것들 말이다), 유독 남자에게 관대한 사회분위기와 여자 스스로를 과도하게 검열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 가부장적인 가치에 사로잡힌 부모님과 친인척들 그리고 인터넷에 떠다니는 온갖 여성혐오 콘텐츠 등... 수를 세자면 끝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이 게임을 시작도 하지 않는 방법 또한 삶을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많은 여자들이 나와 같이 생각하기에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어쨌든, 삶은 혼자든 둘이든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로움은 내 자신이 지성체라는 것에 대한 방증이다. 공허함으로 느껴지는 그 구멍을 무엇으로든 막고자 한들, 결국엔 혼자라는 사실만 더 뚜렷이 깨달을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헛된 로맨스로 채우느니, 오히려 인생의 동반자로 끌어안는 것이 이 지겹고도 고독한 삶을 헤쳐나가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싶다.
"그가 원하는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로맨스는 페미니즘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늘날 꽤나 보편적인 고민이다. 또한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던지고 해답을 찾으려 노력한 이런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어떻게 나를 잃지 않고 타인을 사랑할 것인가.‘- P13
여자들이 이성애와 자기애 사이에서 최소한 15년은 고민을 해 왔다는 건 슬픈 현실이다. 어째서 타인을 사랑한다는 게 나 자신을 잃는 일이어야 하는가. <어쩌다 로맨스>는 자기애를 열렬히 응원하는 것으로 이 질문에 답한다. 그것이 시대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P81
나는 자라면서 "남자 기 죽인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우리 세대 여자들은 동네 친구들끼리 뛰어놀다가 싸움이 나도, 시험 성적이 좋아도, 친척 앞에서 남동생의 잘못을 지적해도, 놀이 집단에서건 회사에서건 같은 성별이 삼삼오오 모여서 큰소리로 웃기만 해도 "남자 기죽인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남자의 기는 내가 기억하는 지난 40여 년간 줄곧 사경을 헤메고 있었다. 가정의 여자들이 온 힘을 다해 반짝 살려 놓아도 밖에 나가서 다른 남자들한테 치이면 금세 다시 죽어 버리기 때문에 항시 신경 써 돌봐야 했고, 어머니들은 아들이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할 때면 조선시대 아궁이 불씨 맡기듯 며느리에게 그 의무를 물려주었다.- P85
"남자는 밖에 나가서 큰일해야 되니까 집에서라도 편하게 해 주라"는 어머니 세대의 덕목은 여성의 사회 진출과 자아실현 추세에 발맞춰 "남자는 단순하고 아이 같으니까 잘 구슬려서 이용하는 게 여자의 지혜"라거나 "남자는 스스로 자기 정서를 돌보지 못하니까 여자가 도와줘야 한다"등으로 변형됐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오냐오냐해 주라는 거다. 한편으로 남자의 성욕, 분노, 폭력, 미숙함 등은 본능이라면서 반쯤 눈감아 주는 사회 분위기가 여자들을 더욱 조심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부정적 기분을 품을 만한 표현을 삼가는 것은 여자들의 생존술이요, 법 대신 이 사회가 채택한 안전장치였다.- P86
언제까지 성공한 여자들이 남편 눈치를 보고, 남자는 불필요한 경쟁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애초부터 이 문제의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도 불평등한 위계 관계를 맺도록 강요하는 이 사회에 있지 파트너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지 않는 여자들에게 있는 게 아니다. (중략) 여자는 남자를 위한 자존감 자판기가 아니다. - P90
인간의 성격에는 국적, 인종, 성별, 직업에 따른 차이보다 개인차가 더 크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굴 만나도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대상의 카테고리를 크게 나눠 보편화할수록 실체에서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 P137
투블럭이나 버즈컷을 안 어울려서 안 하는게 아니라 당장 탕비실 생수통에 독약을 풀 불만분자처럼 보일까 봐 못 하는 여자들도 있다.(중략) 하지만 데이트를 할 때도 남녀가 다른 강도의 꾸밈 노동을 강요받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거리에 나가 보면 공들여 기른 긴 머리에 색조까지 들어간 풀메이크업, 컬러 렌즈를 끼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야구 모자를 쓴 남자들과 팔짱을 낀 채 돌아다닌다. 남자들은 곱슬머리에 안경을 끼고 배를 내밀고 다니면서도 연애를 꿈꾸는데 여자들은 안경조차 끼지 않고 365일 다이어트 얘기를 하고 자꾸만 더 예뻐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P155
나는 화이트칼라라곤 농협과 수협 직원, 공무원, 교사 뿐인 도시에서 자랐다. 그 지방 남자들은 일단 공부를 해 보고, 안 되면 장사를 하거나 배를 타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아내에게 빌붙었다. 반면 일하지 않는 성인 여성은 없었다. 그들은 논밭, 식당, 공장, 노래방, 상점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가정을 건사했다. 그럼에도 남편은 물론 여자들 자신도 아내의 일이 가계의 주 수입원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큰일을 해야 한다‘는 믿음 떄문에 남편들의 빈둥거림은 언제까지나 미래를 위한 유예 기간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여자가 아이를 낳고 기르고 먹여 살리는 동안 남편들은 변변히 한 일도 없이 가부장의 지위를 차지했다. 물려줄 만큼 명예로운 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성씨를 이어받을 아들을 낳으라 아내를 구박하고, 차례마다 제 조상을 먹이기 위해 온 가족을 부려먹고, ‘계집‘과 ‘사내‘를 엄격히 구분하여 집안일 따위는 깔끔하게 거부했다. - P188
나는, 여자는, 살아남아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 불편한 남자들의 기분을 맞춰주고, 순진한 척하고, 거절을 에둘러 말하는 등의 감정 노동을 해야 한다. 이미 여자들은 충분히 조심하고 있다. 그러니까 괜히 피해자 말버릇 걱정할 시간에 폭력은 나쁜 거라고 잠재적 가해자들이나 제대로 가르치길 바란다. 친절하게 굴면 관심 있는 줄 알고 팬티 바람으로 덤비고, 단호하게 말하면 분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들에게 대체 어떻게 거절을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난단 말인가. 과연 답이 있기는 한 문제인가?- P250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여자들이 No라고 말할 권리를 위해 인생을 걸고 싸우고 있다. 싫다, 하지 마라, 불편하다, 사과하라, 이 단순한 단어들을 이해하는 게 왜 누군가에겐 그토록 힘든 일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