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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일상
  • 며느리 사표
  • 영주
  • 12,420원 (10%690)
  • 2018-02-12
  • : 1,023

읽기는 쉽고 쓰기는 어렵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임한 일상의 결과물일까? 나는 과연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평생 제3자로서만 접했던 '며느리'의 당사자가 되었다. 이 단어에 따라붙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며느리'라는 단어는 그 모양부터가 아주 못생겨 보이고, 어떨때는 모종의 멸칭처럼 보인다. 종종 보이는 '며늘아가'라는 단어도, '아가'라는 그나마 긍정적으로 보이는 단어를 가져다 붙임으로써 쓰레기에 꾸역꾸역 리본을 달아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에 리본을 달고 꽃을 달아 장식을 했다 한들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시대가 진짜로 변하기도 했다. 여전히 인터넷과 라디오와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연들에는 고부갈등이 단골소재로 등장하지만, 어쨌든 '옛날만큼' 고된 시집살이를 하는 집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랄까, 이 '며느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여전히 구리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이 찝찝한 어감의 단어가 내 역할이 된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딱히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생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방인이 되는 기분, 자연스럽게 을이 되어버린 입장에서 느끼는 기분,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것이 나와 남편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은 정말 존나 구리다. 그리고 그것을 시부모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의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인 엄마가 나를 나무랐다는 사실이 아주 존나게 구려서, 엄마한테 사과를 받았음에도 아직 구린 기분이 남아버렸다.


재차 말하지만 시댁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 '시댁'이라는 단어도 기분이 좀 그렇다. 시댁은 일반적으로 쓰면서 여자의 집은 왜 '처가'를 일반적으로 쓰는가? 둘다 존칭을 쓰려면 '처갓댁'을 일반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물론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처갓댁은 맞춤법에 맞지 않다며 쓰려면 '처댁'을 써야 한다고 하겠지. 그럼 처댁을 쓰라고. 뭐가됐든 똑같이 존칭을 붙이란 게 내 요지다.) 그리고 사실 몇 번 가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몇번 가보지도 않은 사이에, 묘하게, 정말 대화에서 묘하게 을의 입장이 되는게 기분이 존나 오묘하다. 

일단 시어머니는 자식자랑을 많이 하신다. 은근한 자식자랑이다. 그리고 친구 자랑도 좀 하시고, 본인 집안 자랑도 하신다. (시아버지는 대화에 끼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것은 이해한다. 우리 엄마도 한 자식자랑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점은, 이렇게 은근히 끊임없이 자식자랑을 하시면서도, 남편이 (눈치없게) 내 자랑을 하면 묘하게 대화의 주제가 바뀐다거나 시어머니가 못들은척 하신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어색해서 그러시는가 싶었는데 계속해서 그러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이지 웃음이 났다. 

그리고 두번째는 시댁에서의 묘한 을의 나의 입장이다. 요번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시댁에 하루 자고 왔는데 식사준비도 시어머니 혼자 하시고, 마무리도 어머니 혼자 하셨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시아버지가 남편보고 설거지라도 하라며 화를 냈다. 물론 우리 집이었다면 내가 나서서 엄마가 상차리는 걸 도와드리고, 아빠는 식후 과일을 손수 깎고, 밥먹은 후에는 내가 나서서 설거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남편의 집이 아닌가? 그러면 무엇을 하던지간에 남편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만약 남편이 나서서 시어머니를 도왔다면 나도 기꺼이 도왔을 것이다. 사회생활 n년차인 나에게 그만한 눈치는 있다. 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안 했다. 식사를 준비할 땐 덥다고 방에 들어가 에어컨만 쐬었고, 식사 후에도 나서서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뭔가를 나서서 하는 건 웃기지 않나?? 심지어 남편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때도 접시를 나르기는커녕 가만히 앉아만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가 동생 집 마당에 잡초를 뽑을 때도 내가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가서 같이 도와드리라고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장모님이 혼자 잡초 뽑는 걸 구경만 했다.(결국 남동생이 가서 도와드렸다.) 쓰다보니 열받는군. 이런 상황에서 더 열받는 건 엄마가 나에게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고 나무랐다는 것이다. 후의 통화에서 나의 생각을 말하자 엄마도 세상이 바뀌었다며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 했지만 뭐, 그 때의 생각만 하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어쨌든 뭐, 이것은 책에 대한 리뷰인만큼 책에 대해 몇 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내용 자체는 평이하다. 빡센 집안의 맏며느리로 있던 전업주부가 며느리역할에 사표를 내고 홀로 서는 과정에서의 성장을 기록한 에세이다. 시가에 갇혀 살면서, 외도까지 한 남편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았을지 가늠이 되진 않지만 뭐,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스스로를 위한 인생을 찾기 위해 홀로 선 용기와 성찰에는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몇 가지 동의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상대 남자에게 떠넘기고 ‘사랑하니까 다 알아서 해주겠지‘하거나,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상대의 야행성 동물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락하는 셈이다.- P113
그것은 시댁에서의 관계뿐 아니라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그랬다. 시댁의 여자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뜻에 따랐다. 나는 시댁 여자들과 다르다고 여겼다. 그러나 겉으로는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입으로만 그럴 뿐, 행동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P163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서 쓴다는 것이 큰 힘이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것을 계기로 남편과 자식의 불균형을 보게 되었고, 어머니처럼 남편에게 의존하는 삶은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P173
그리하여 자신 안의 황금을 무시하는 것은 자신 안의 괴물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훌륭하지도 않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또 능력을 개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으로 자기 대신 다른 누군가가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사람, 친구, 동료, 배우자에게 향하는데, 특히 자신의 아이들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으니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대신 이루기를‘ 자녀들에게 원한다. 그 이면엔 자신은 애쓰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 금이 든 광맥을 발견했는데 귀찮아서 개발 안 하는 것과 같다고 로버트 존슨은 말한다. 우리는 자신 안의 세종대왕, 신사임당의 숭고한 특질을 발견해서 실천하기보다는 멀리서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P207
의식의 여정에서 고통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전환을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결코 달아날 수 없는데, 아무리 달아나려 발버둥 쳐도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이중으로 불행할 뿐이다.(중략) 의식을 확대하는 작업에는 잔인하지만 변치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이고 자발적으로 고통을 수용할 때에만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피해보려는 시도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업의 쳇바퀴를 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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