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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는 일상
  • 적과 흑 1
  • 스탕달
  • 9,450원 (10%520)
  • 2004-01-15
  • : 4,516

열정과 야욕 참회가 뒤섞인 역사소설


신분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자 희망일까? 

각자가 목표로 하는 사다리의 높이와 위치가 다를지 몰라도 상승에 대한 열망 자체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숙명의 굴레인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 인간사회의 양상이 1814년 나폴레옹 몰락 후 프랑스 사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나폴레옹의 치하에서 신분상승의 격동을 목격한 쥘리앵이, 자신이 살고 있는 왕정복고의 시대에 대해 한탄하는 부분을 볼 때마다 '만적의 난'이 떠올랐다. 브장송의 신학교에서, 그저 배고픔을 면하게 된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 체제에 끔찍히 순종하는 모습은 1984 빅브라더 체제에 비판없이 순응하는 이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챕터마다 해당 내용에 상응하는 구절이 삽입되어있고, 군데군데 작가 갑자기 등장하여 본인의 변명을 하는 부분이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폭풍같은 후반부의 전개를 막 끝마친 지금 드는 생각은, 과연 마틸드의 명예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정말이지 쥘리앵이고 마틸드고 끓어오르는 격정과 젊음에 따라 튀어오르는 인물이다 보니 그들의 행동을 한치 앞도 예상할 수가 없다. 마틸드는 과연 자식을 낳았을까? 아마 임신 후 대략 6개월이나 지났으니 낳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비밀 출산을 하였을까? 아니면 가문의 권력을 등에 업고 새로운 청혼자 후보와 결혼했을 것인가...


이 책은 신혼여행과 그 후 대략 한달 동안 나와 함께 하였다. 휴양지로 여행을 간 터라 죽치고 읽을 책이 필요하여 적과흑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질 않아 완독하는데 대략 한달 조금 넘는 기간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장편의 책을 읽고 나면 모종의 흐릿하지만 애달픈 노스탤지어가 몰려온다. 꼭 시간여행을 통해 1830년대의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돌아온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책의 결말이 비극적일수록 배가되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인물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니(그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드 크루아즈누아 후작의 죽음이다! 그는 마틸드의 돌아갈 거처가 되었어야 했는데!) 돌아갈 수 없는 도시를 영영 떠나버린 기분이 든다.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재판에서의 쥘리앵의 연설 아닐까. 거의 자살 선고와도 같았던 그 연설은 1830년대 사회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자, 여전히 현대사회에도 적용되는 문제를 꼬집는다. 해당 부분을 읽으며 나는 많은 여성들을 떠올렸다. 작은 재판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잘잘못을 가름하는 권력의 중추에는 여전히 남자들이 많다. 기득권인 남성들. 여성들은 매순간 다양한 이유로 말미암아 이들의 앞에 서고, 편파적인 판정을 받으면서도 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층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는 성별이 아닐까. 그리고 여전히 이 공식은 유효하며, 두 성별이 동등한 권력을 누리기엔 아직도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여성판사로 가득한 재판장에서도 여전히 성범죄자는 지금처럼 깃털같이 가벼운 처벌을 받을 것인가. 권력의 핵심을 여성이 지배한 세상에서도 여성들이 지금처럼 성범죄에 노출되어 있을 것인가. 두 걸음 전진과 한걸음 후퇴가 반복되는 더딘 발전은 얼마나 더 쥘리앵과 같은 희생자들을 필요로 할 것인가.   

  

"배심원 여러분, 죽음의 순간에 부당한 경멸을 받을까 염려하여 발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계급에 속하는 영예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본인은 자신의 비천한 운명에 반항한 일개 농부인 것입니다."
여기서 쥘리앵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용서를 청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조금도 환상을 품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 죽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인은 온갖 존경과 찬사를 받아 마땅한 훌륭한 부인의 생명을 빼앗을 뻔했던 것입니다. 드 레날 부인은 내게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내 범죄는 잔혹한 것이며 또한 계획적인 것입니다. 배심원 여러분, 그러므로 본인은 사형을 당해 마땅합니다. - P373
그러나 내 죄가 좀 더 가벼운 것이었다 해도 사람들은 내 젊은 나이가 동정을 살 만하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나를 통해 나와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을 징벌하고 그들을 영원히 의기소침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본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즉 하층 계급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다행히 좋은 교육을 받았고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사교계라고 부르는 것에 대담하게 끼어들려 한 젊은이를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바로 본인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나는 나와 같은 계급의 동료들에게 판결받지 못하는 만큼, 내 범죄는 더욱 더 준엄한 징벌을 당할 것입니다. 본인의 눈에는 배심원석에 부유한 농민 하나 보이지 않고 오직 분개한 부르주아들만 있을 뿐입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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