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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공간을 나누어 가졌다. 그 각각의 공간은 꿈을 가지고 살 수도 있게 아니게 할 수도 있다. 어떤 공간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거울이 얼굴의 표정일까?

며칠 전 공간 식구들을 만났다. 길을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며 뒤돌아 보니 포장마차를 일터로 삼아 서 있는 부부를 보게 되었다. 무표정하게 꼬치에 숙달된 손놀림으로 오뎅을 꽂아 넣고 있는 아주머니. 붕어빵 굽는 주물에서 올라오는 따끈한 불기에 노그라져 시커먼 면장갑을 우두커니 보고 있는 아저씨.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어느 공간에 서든지 그들이 속한 공간을 벗어나지는 않는가?

그들이 속한 공간을 나는 안다. 작년 늦은 봄 큰고모댁을 다녀왔다. 고모님 댁이 있는 수도곡산이 변한 모습의 부조화에 놀랐다. 송현 교회는 몇 집을 쓸어내 주차장을 늘리고 그 주변도 교회 부수 건물을 짓는 외적규모의 확장을 했다. 그리고 한 쪽 산등성이의 나즈막한 지붕선이 고층 아파트의 건설로 사라졌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골목길과 허름한 성냥갑 같은 집들은 그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곳에 있었다. 상점과 노점상의 초라한 물건들도 그 때 그대로 참.. 변함이 없는 곳이다. 교회의 첨탑과 고층 아파트의 위세에 더 낮아 보이는 초라한 슬레이트 집의 부조화는 인천의 탁한 공기와 같이 그 공간에 존재한다.

김중미 글인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우리는 그 공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괭이부리말은 인천에서도 가장 오랜 빈민 지역이다. 그 공간에 거하는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은 작은 성냥갑 같은 집에서 꾸물꾸물 살아간다. 궁색하고 구질한 그 곳에서...희망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아니 그 단어도 낯선 그 곳의 사람들은 삶의 고단함에 익숙해져서 자유로움을 죽음으로 받들이지 않을까?

60~70 년대 익숙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 고스라니 남아 있는 곳. 서로 정에 굶주려 인간의 힘을 잃은 자들의 집합과 같은 그곳의 모습이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과 조각난 가족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아픔을 인간의 정이라 굳이 이름짓지 않아도 보듬어 주는 청년과 진지한 선생님에 의해 그리고 한 청년의 자기 찾는 시간에 의해... 다듬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 오지만, 그 사랑의 모습이 안스럽고 슬픔으로 보이는 것은 그 허무한 몸부림을 아는 나의 부정적인 시각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들의 작은 힘으로 사랑과 근면함 속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변할 수는 있겠지... 책을 읽으며 눈물을 자아냈던 동수와 숙자,숙자 아버지 그리고 영호의 작은 사랑의 행동과 표현이 아름답게 마음에 담아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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