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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님의 서재
  • 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로버트 미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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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21
  • : 326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화점 도달

 

 영국 정부는 각종 비용을 대기 위해 아시아 동인도회사 또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세할 수 있었다. 인지조례로 홍역을 겪었음에도 심각한 고민없이 후자로 결정되었다. 2차 피트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톤젠드의 추진으로 톤젠드법이 통과되었다. 톤젠드법은 관세법, 세입법, 정지법 등을 포함하는데, 내용은 뉴욕의회의 법안제정권 박탈, 수입품 과세 등이었다.

 이미 아메리카 식민지는 신민의 동의없는 모든 조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은 부재했고, 아메리카 정치인들의 행동이 큰 영향을 주었다. 메사추세츠 의회는 톤젠드법에 반대하기 위한 협력을 촉구하는 회람편지를 통과시켜 타 식민지 의회에 송부했고, 버지니아 의회에서는 영국 의회, 국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법만큼 중요한 것이 관례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파견된 세관위원들은 관례를 깨고, 보스턴에 정박된 리버티호를 사소한 절차상의 트집을 잡아 나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도시의 시민들은 폭동과 집회를 통해 군함의 퇴거와 선박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메사추세츠 총독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고, 영국군함은 보스턴으로 입항한다. 리버티호 사건으로 톤젠드법 폐지를 위한 영국 물품 불매운동은 소수 지역을 제외하고, 전역으로 파급된다. 상인 단체 등 민간단체들의 합의는 영국물품 수입거부와 아메리카 제조업 장려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는 사실상 강제성이 있었다. (워낙 이해관계가 다양하여 일부는 합의에 참여하기를 꺼려했으나 대다수는 제재에 지지하였다. 또한 공동체의 합의를 거스르기 어려웠다. '자유의 적'에 대해선 망신주기, 명단공개 등을 통해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했다.)

한편, 보스턴 주민들은 주둔한 영국군을 껄끄럽게 여겼다. 각종 범죄와 군의 경직된 분위기는 도시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병사들도 열악한 주거문제나 적대적인 분위기 등의 고충을 가지 있었다.) 1769년 세관 보조원의 우발적인 소년 살해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청년들은 둔기 등을 사용하여 군인과 충돌하였다. 1770년 3월 5일 밤, 분노한 군중들과 군인의 몸싸움 중 우발적인 발포로 시작되어 군중 11명을 살해한 보스턴 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의외로 군인들은 재판절차에 따라 처벌받았고, 톤젠드법도 대다수 시정되었다.

 그러나 차세법은 폐지되지 않았는데, 식민지인들에게는 금액의 문제가 아닌 영국의 과세권이라는 족쇄가 남아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의 '폭정(과 그 가능성)'을 증명해주는 장치였기 때문에 정치적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화약고 역할을 하였다. 1773년, '가짜 인디언들'이 '바닷물로 차를 우려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위기를 느낀 영국의회는 즉각 반응하여 보스턴의 봉쇄, 메사추세츠 정부의 직할령화 등 5개의 법을 차례로 통과시킨다. 이에 대응하여 전역에서 상인, 정치인 등이 자발적으로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1차 회의는 식민지의 포괄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선언과 함께 경제적인 단호함을 보여주기로 결의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검소, 절약, 근면, 사치금지와 같은 프로테스탄트적 윤리를 분명하게 언급했다는 것이다. 대륙회의에서 무장투쟁이 결의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받던 메사추세츠에서 무장을 시작하였고, 곧 식민지 전체로 확산된다. 한편 본국과 식민지 주둔 영국군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국왕과 내각은 식민지인들이 단순한 오합지졸이고, 지도자들만 체포하면 사태가 종결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개전

 

 미국독립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기습으로 시작하였다. 콩코드의 무기를 압수하기 위해 원정군은 야간에 보스턴을 출발한다. 하지만 출발 전부터 공격계획이 누설되었고, 영국군은 도심에서부터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병들과 교전 끝에 대패한다. 2차 대륙회의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영웅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대륙회의는 공격 목표 결정, 양병과 보급, 외교 등을 지휘하는 전시 총사령부 역할을 하였다.

 1776년 3월 하순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축출한 후 7월에 국왕에 대한 탄원서 제출했다. 아메리카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독립에 대한 확신은 부재했었다. 10월에 영국국왕은 아메리카 봉쇄와 역적 토벌을 명령했다.

 

 

 새로운 '계약'을 언명하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한 가이드라인이라도 없으면 행동하기 어려워한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은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과 행동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준 책이다. 단호하게 군주제, 영국정부의 부패성을 공격하고 권리 수호를 외치며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1776년 3월 무렵 국왕의 독일용병 파병계획으로 아메리카의 온건파들도 영국을 이반하였다. 7월에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3월에서 7월 사이에 수많은 독립선언이 있었지만, 7월의 독립선언은 모든 지역의회의 비준을 받아 대륙회의에서 공표한 것이었다. 논리의 주축은 로크의 사상으로, 인간의 양도불가능한 권리(자연권)인 생명권, 행복추구권, 자유권을 내세웠다. 영국 정부와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며 그것이 양 정치체의 계약 해지의 원인임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전쟁의 양상

 

 미국인 이야기 2~3권은 미국독립전쟁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상세한 개략은 생략하고 아메리카가 전쟁에 승리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강병이었던 영국군은 왜 시민군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일 수 없었을까(*사견이 많이 들어가 있음)

 첫째 원정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미국 동부의 남북으로 광활한 영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영국군의 수는 수만명 수준이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수송로, 점령지를 보호해야 하는데 아메리카군에 비해 수가 압도적이지 않았다.

 둘째, 양측의 병기수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아메리카군도 머스킷과 박격포, 중포 등의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메리카군이 사용한 수렵용 라이플은 영국군의 머스킷보다 장전속도는 느렸지만 명중률이 높았다. 이는 이후 유럽군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약 19세기 중반 전쟁이 일어났으면 유럽의 빠르고 선진적인 병기와 군제로 인해 시민군이 패배를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본국과 아메리카 대륙의 먼 거리는 복합적인 문제를 낳았다. 영국정부는 대전략이 없었고 현지와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하지 못했다. 대전략의 부재는 군사행동의 지연과 미진한 대륙 봉쇄, 프랑스의 참전의 실책을 만들었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불리한 상태였고, 혁명의 확산 문제, 영-미 관계에 대한 의구심으로 참전을 꺼려했다. 영국은 유럽 각국의 개입을 낙관적으로 판단한데 반해 대륙회의에선 프랑스의 경제적 이권을 보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여 내전이 아닌 국제전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전쟁의 지휘를 맡은 것이다. 그는 프렌치 아메리카 전쟁에 종군경험이 있으면서도 유럽 전술 연구에 매진하였다. 덕분에 기존의 유럽의 전쟁과 다른 방식으로 독립전쟁은 진행되었다. 영국군은 유럽의 정규전인 밀집대형으로 일제사격 후 총검돌격을 실시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반면 워싱턴은 정규전, 유격전, 진지전, 산병전을 상황에 맞춰가며 사용하였고, 정규군과 민병을 모두 활용하였다. 그는 규율과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유분방한 병사들에게 전쟁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당시 아메리카군에서 여러 원인으로 상당한 탈영병이 발생하였다) 또한 전투에 패배했음에도 결정적인 섬멸을 당하지 않았다. 만약 워싱턴의 군이 한 번이라도 섬멸당했다면 독립전쟁은 바로 끝이 났을 수도 있었다.

 

 강화 이후

1781년 프랑스 함대의 체서피크 만 해전과 미-프 연합군의 요크타운 포위전으로 영국 원정군 주력은 항복하였다. 1782년 11월에는 영국과 아메리카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1783년 9월에는 모든 당사국들의 서명으로 국제전이 종결되었다. 주권을 인정받은 13개주는 미합중국이 되었고, 영국의 아메리카 서부영토도 양도받았다. 12월에는 워싱턴이 공화정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공직에서 물러난다.

전후 미국에는 다양한 현실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시에 발생한 부채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새로 획득한 서부영토의 관할권 문제도 있었다. 주와 연방의 관계도 설정해야했다. 각 주는 전쟁 전부터 주헌법을 제정하여 인민들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연방헌법은 1787년에 제정되었는데, 백인백색의 의견들이 치열하게 오가는 와중에 새로운 생각들이 도입되었다. 이전까지 인민의 단일한 의지를 이상적으로 여겼지만, 미국인들은 현실을 겪으며 다수의 폭정을 우려하였다. 다원주의를 인정하여 과도한 권력의 제한, 이익집단의 인정, 당파주의를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깨닳은 것이다. 동시에 인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여 인민의 통제를 받는 하원을 개설하였다.

 

 

 책에서 나가며

 미국독립전쟁은 수많은 의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적으로 소외받았던 하층민들도 자유와 권리를 위해 스스로 투쟁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는 것을 꼽고 싶다. 민주정이 튼튼한 이유는 한 순간,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위기를 극복하며 강해진 축적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외세에 의해 민주공화국이 위기에 처해있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과 의지만큼은 240여년 전의 아메리카인들이 가졌던 그것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과거를 이해하기에도, 현재를 이해하기에도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미국인 이야기를 추천한다.

 

 

 

본 게시글은 부흥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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