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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근대 국가는 외견상 항구적이고, 아주 튼튼해 보이지만 빈번하게 탄생과 소멸해왔다. 보통은 개혁, 혁명, 독립, 국제조약을 거치는데,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도 1945년 이후 정체, 국체가 변동했을 정도이다. 국가의 탄생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미합중국이다. 18세기에 13개의 식민지에서 자발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튼튼한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 과정은 질서정연하고,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혼란과 미지의 선택의 연속이었다.
미국인 이야기 1권의 서평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가졌던 이념과 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종장에서는 동아시아와의 비교로 마무리 지어려 한다.
독보적인 강대국, 18세기 영국
1755년, 7년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산된다. 프랑스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발전한다. 영국은 초기에는 수세에 몰렸지만 윌리엄 피트 내각하에 위기를 잘 극복하여 대륙, 인도, 아메리카에서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1761년, 조지 3세는 의욕적인 피트를 실각시키고, 전쟁의 강화를 체결한다.
당시 프랑스는 온 유럽에서 선망받는 국가로, '변방'의 영국과 대비되었다. 프랑스는 선진적인 과학, 사상, 근대적 인프라,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이미지상으로는 (매력적이지 않고 비정통적인) 대의정치에 의해 왕권이 제약받고 있었고, 해외 진출과 사략행위에 몰두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 경영, 교역, 전쟁으로 인해 매우 강력한 국력을 축적한 상태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수많은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동유럽이나 북유럽, 남유럽에는 허약하거나 상업과 산업이 지체된 국가들만 존재하였다. 프랑스도 구체제가 내부를 갉아 먹고 있었다.
18세기까지도 세계 각국에서는 공익 추구, 복지 등은 낯선 것이었다. 정책, 행정, 외교는 국왕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고, 왕은 자유롭게 내각, 관료를 선출한 것은 특별하지 않다. 의원들은 봉사가 아닌 가문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입후보하였다. 영국의 지방 행정은 지방정부, 교구, 자치구, 특별기관이 수행했다. 수많은 특별기관은 법령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중앙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녹지 준설, 도로 건설 등을 수행했다.
아메리카인의 자부심
아메리카인들은 그들의 풍요로운 영토, 발달한 상업, 수공업, 종교적인 열정, 유럽적 기반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척과 노동을 신성시하였다. (예를들면 근세 일본의 경우에도 사회상과 맞물려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다. 당시 세계 절대다수는 전제국가였지만 영국은 입헌군주국이었고, 아메리카를 보호하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이주는 인구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동단위당 산출량은 증가하였고, 무역 규모도 커졌다. 그러나 잦은 사회변동,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경기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였다. 또 도시의 대상인과 농촌의 대지주로 부가 집중되는 현상으로 계층화가 심각했다. 대지주는 특권을 받는 귀족이자 장원의 소유자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영국의 특허장은 지대수취권과 재산몰수권한, 재판권을 보장했다. 대다수 인구는 평생 소규모 촌락에 거주했다.
아메리카는 특이한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토지소유자와 임차인에 투표권을 부여하여 대다수 백인 성인 남성은 지방선거에 투표가 가능했다. 식민정부는 본국처럼 특정 인물들이 관직을 나누어 가졌지만,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경제적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기독교와 유럽의 비주류인 자유주의적 사상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청교도주의와도 밀접한 휘그사상은 전제정에 대한 반대와 권력분립을 중시하였다. 종교는 다종다양한 아메리카인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였다. 유럽에 비해 종교적인 열망이 강했고, 평신도의 권한이 강력하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절대자의 존재는 후에 '대영제국'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영국 정부의 실책
잦은 전쟁, 거대한 군, 관료제의 상비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영국정부는 기존의 토지세만으로 충당할 수 없어 차입, 은행대출, 주식, 펀드, 물품세 부과 등을 도입하였고, 아메리카에도 적용되었다. 식민지 경제정책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속국이라는 관념으로 인해 무질서하고 경직적으로 시행되었다.
1763년 프랑스와의 전쟁 후에 아메리카에 주둔한 상비군은 지역주민에 대한 충분한 설득없이 서부 팽창을 저지하였다. 처음에는 영국 내에서 물품세를 부과하였지만 서머싯주와 데번주에서 사과주세 철폐운동을 벌이자 영국의회는 식민지에도 부담을 전가하고자 하였다. 부주의한 법률제정은 당밀법에서 시작된다.
18세기 대서양 삼각무역에는 북미, 서인도제도, 유럽, 아프리카가 엮여 있었다. 그 중 럼주와 당밀, 설탕이 중요하였는데, 원료인 당밀은 프랑스/네덜란드령 서인도제도에서 밀수할 수밖에 없었다. 1764년에는 설탕법으로 관세와 강화된 처벌을 규정하였다. 당시 식민지 경제는 7년전쟁의 종결로 인한 수출 감소로 불황에 빠지고 있었다. 영국의 엄격한 밀수단속으로 식민지 곳곳에서 관리와 선원들은 충돌하였다. 상인들은 본국에 '무역백서'라는 논리적인 문서를 보내 법안 철폐를 촉구했다. 거기에 인지세법 제정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초기에는 아메리카인 대표자들이 내각수상과 면담을 요청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보스턴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식민지 징세원들은 위협을 느껴 사임했다.
결과적으로 1766년 영국의회에서 인지세법 철폐되었지만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어냈다. 첫째, 영국에 순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도록 각성을 일으킨 것이다. 조직적인 정치적인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불합리적인 과세에 공공연하게 반대하였다. 둘째, 영국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꼈다. 18세기 영국에는 비주류 의견이지만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를 개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들은 타락한 영국이 식민지에 대해 각종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영국정치인들 다수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국내외의 상황에 따라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세하기를 원했다.
재산의 보호와 의회제도는 왜 중요한가?
현대의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조세평등주의와 조세법률주의가 규정되어 있다. 헌법에 수록된 내용은 대다수 역사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맞서 쟁취한 권리이다. 존 로크는 재산의 정의에 물질뿐만 아니라 신분, 자유, 평등, 생명 등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물질이 사회적, 정신적 권리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인의 동의없이는 재산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었다. (다만 노예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였다.) 변화무쌍하게 개척이 진행되었던 식민지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로크의 관점을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의회의 권력한계에 대한 성찰도 시작되었다. 당대에 의회권력은 자기통제에 의해서만 제한이 가능했고, 실질적으로는 한계가 없었다. 특히 아메리카 사상가들이 볼 때, 식민지 신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영국의회의 독주를 제어하고 관할권을 제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에 대한 답은 당시에는 미완된 상태였지만, 그들은 관습법을 존중해야 하고, 식민지 과세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1권을 서평을 마무리지으며
동아시아와 영/미의 비교사적 검토도 유의미해보인다. 양 문화권의 정치적 의사표현 문화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명대 중국의 도시민들은 부당한 요역, 세금 등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 종종 폭동을 일으켜 항의하였다. 예외적으로 개독의 변은 관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치적 목적을 수반한 항쟁이었다. 에도 막부의 전직관리이자 양명학자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덴포 대기근의 분위기에서 정책의 부당성에 항의하며 오사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홍경래의 난은 지역차별, 경제적 착취 등과 맞물려 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역사적으로 진전을 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동아시아는 언로를 보장하였고 나름의 논리체계를 중시했다. 관료들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한 것도 선진적인 문화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계층은 협소하였고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 정치적 행동은 특히 금기에 해당하였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도 분명히 했다. '조법(祖法)'이라는 개념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게 하였다.
영국의 정치적 분위기는 일견 무질서해보이는 소요, 폭동 등의 폭력이 수반되었다. 엽관제와 매관매직을 공식적으로 시행하여 부정부패와 합법의 선이 모호했다. 하지만 어느 수준까지의 시민들의 단체행동, 시위는 용인하였다. 탐욕과 이권 못지않게 법논리와 토론을 중시하여 논리적인 대응을 중시했고, 표현의 자유도 넓게 인정했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여 안정을 중요시한 동아시아는 모두 정체가 변화하였고, 지속적으로 변화를 수용한 영미 양국은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각 문화권의 배경과 발달 경로는 상이하기 때문에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미권이 단순히 풍족했다는 이유를 넘어 선진국으로 발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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