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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j5540의 서재
  • 눈의 소철나무
  • 도다 준코
  • 13,320원 (10%740)
  • 2020-01-30
  • : 47


소가 마사유키는 서른두 살의 나이에 벌써 머리가 새하얗게 샜다. 온몸에는 화상 흉터가 남아 있고, 그 후유증으로 매일 고통 속에 살고 있고, 팔꿈치와 무릎, 손가락을 쭉 펴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소가 정원의 조경사로 일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일을 속죄하고자 중학생인 료헤이를 아기 때부터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왔다. 그러나 과거의 일을 알게 된 료헤이는 반항하며 자꾸만 엇나간다. 심지어 료헤이의 할머니인 후미에는 그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마사유키는 그렇게 12년을 살았고, 이제 닷새 뒤인 7월 7일에 그녀가 출소한다.

스승님. 정 없는 사람과 한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십니까? 한 지붕 밑에 살아도 남인 겁니다. 말로 하면 쉽지만, 한집에 사는 사람을 생판 남이라고 체념하는 건 정말이지 어렵더군요. 기대하고 말거든요. 아주 약간의 정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채 배신당하지요. 그런 일이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됩니다.

p.205

할아버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마사유키. 나는 정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네 이야기를 들어도 가엾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구나. 너는 아까 이렇게 말했지. 망가졌다고.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망가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망가질 만한 것이 없다고. 잃지도 결핍되지도 않았다. 나라는 인간에게 정이라는 것, 아니, 정이 담겨 있어야 할 마음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p.206

주인공 마사유키는 할아버지를 스승님이라 부르고, 아버지를 도다오씨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과 밥을 같이 먹어본 적도 없고, 매일 혼자 책상에서 밥을 먹는다. 영문도 모른 채 안절부절하는 마음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꽁초는 밥을 다 먹고 난 그릇에다 버린다.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고 가르쳐 준 이도 없었다.

"결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몸서리칠 때가 있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꽤나 오래 걸렸다.  그래도 상처가 많이 아문 지금 이 시점에 이 소설을 읽는 것이 매우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선의 오르내림에  조금 당황은 했지만 예전보다 덜 고통스러웠다. 그것을 지나쳐온 사람이어서 관망의 자세를 가질 수 있었다.

마사유키는 결핍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처음에는 그게 뭔지조차 몰랐다. 결핍이라는 것도 결국 타인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마이코와 류헤이 그리고 호소키 영감과 하라다 같은 좋은 사람들을 통해 마사유키는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조금씩 깨닫게 되고, 그들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치유된다는 말은 감히 할 수가 없다. 이끼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마사유키의 마음 속 그늘이 얼마나 캄캄한지 가늠할 수가 없다. 치유될 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할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는것만큼 폭력적인 것 없다. 범죄자들보다 더 나쁜 사람은 무관심한 부모다.

일본 소설이라 이름이 어려워 마인드맵을 활용해서 초반부만 정리해가며 읽었다. 이름을 외우려고 무의식중에 애쓰지 않고도 인물들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는 유독 결핍이 있는 인물들이 많다.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지옥에서 살아간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된 인물, 재능이 없어 좌절하는 인물, 부모의 사랑도 재능도 가져본 적 없는 인물, 부모의 기억조차 가져보지 못한 인물이 나온다. 많은 인물들 중에서 나는 어디쯤 서 있을까? 작가는 저기 어디쯤 숨어 있었던 걸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끝으로 이 소설은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소설이다. 유명한 일본 소설은 거의 섭렵했다고 자부했는데 그럼에도 이 책에는 뭔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 먼저, 조경사라는 직업에 대한 소재가 새로웠다. 오늘날의 서양식 정원이 아닌 요즘 사라져가는 일본 정원을 고수하는 자부심과 3대째 조경사라는 직업을 대물림하는 장인 정신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잘 알지 못했던 조경사라는 직업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조경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이 재미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데 편집을 정말 잘했다. 거기다가 초반부터 전개가 빨라서 금세 빠져든다. 13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해 계속 궁금증을 유발하고, 개연성도 놓치지 않으면서, 감정선이 과하지 않은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기민한 독자라면 문장들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심리 변화에 주목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소설을 평소에 좋아하고 일본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그리고 인물들의 '결핍' 속에서 '나'를 마주할 용기가 있는 독자라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적극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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