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 가는 걸 좋아한다. 몇 번을 반복해서 둘러보고 창덕궁의 전각을 알아갈 때, 지금 내가 보는 모습이 조선시대 때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혼란스러웠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이곳의 미추를 판단해야 하는지 말이다. 지금 내 눈으로 보는 것을 부정해야 할까?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미추의 문제로 따지면 난 지금의 창덕궁도 너무 좋아한다. 한옥, 단청, 인정전 앞에 깔린 박석, 나무, 파란 하늘과 한옥의 어울림 등등 그 자체로 내게는 충분히 매혹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대 초반 창덕궁을 처음 보고서는 반했고 여전히 내가 보는 것은 이 모습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창덕궁을 갔을 때다. 유치원으로 보이는 꼬마들이 우르르 왔는데, 희정당 앞에서 선생님이 건물의 내력을 목청을 높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건물은 어떤 건물이에요, 일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훼손하고 바꿔 놨어요, 일본 사람들이 잘못했지요, 화가 나는 일이에요, 이런 말이었다. 나는 희정당 앞에서 주춤거리며 그 설명을 들으며,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꼬마를 보며, 꼬마의 웃음에도 아랑곳않고 일본에 화 내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먼저 가르치려 드는구나.’ 부정적 감정, 더 많은 지식을 알고 스스로 판단하기 전에 이미 감정의 정답을 주는구나. 감정의 ‘정답’이라 하는 이유는 그게 우리가 일본에 대해 깊숙이, 고질적으로, 대를 이어 간직하는 류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답습하고 물려주며 민족의 트라우마는 계속 트라우마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어떤 식으로 승화되거나 변화하지 못한 채.
저자의 생각처럼, 일제강점기가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라는 데에 매우 매우 동의한다. 일본과 분단, 이 두 가지는 한반도에 태어나면서부터 우리한테 덧씌워진 무게 같은 것이고 이 두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더 히스테리한 이유는 이 스트레스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은 일제강점기의 정치사, 독립운동사, 외교사를 담은 지식 정보 책이자 전 국민적, 전 민족적, 전 국가적 트라우마에 대한 저자의 치유 방법이자 치유 노력이기도 하다. 역사를 제대로 응시하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에 나는 동참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방법과 교육이 지겨워서 그런 것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도, 지금도 반복되는 일본인의 겸허하지 못한 태도도, 그때마다 ‘유감이다’라는 표현을 쓰며 대응하는 모습도. 게다가 현재 일본의 행태에서 일제강점기의 군국주의 잔류를 찾아내며 분노하는 이들은 그 시절을 경험한 연령대만이 아니다. 경험하지 않은 이들도, 일본 총리가 무슨 말을 하든 무심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수록 일본의 행동에 민감해지는 듯하다.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 섬과 다를 바 없는 장소에 살며 기사, 책, 주변 사람을 통해 정보뿐 아니라 분노, 서글픔, 피해의식까지 계속 쌓고 키워가는 것만 같다. 기억에 기억을 거듭하며 분노를 더 또렷이 기억하는 듯싶다. 도대체 한-일 축구 경기는 언제나 마음 편히 볼 수 있을까.
객관적 서술, 깔끔한 구성의 참고서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은 한 번에 완독하고 끝낼 책이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다고 해도 1870년대 개항기부터 1940년대 해방과 분단까지, 70여 년의 기록을 한 번에 꿰뚫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건, 인물, 내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내 머릿속에 배치하려면 암기와 발췌독, 재구성과 내가 가진 정보와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대신 읽으면서 내가 아는 다른 이야기, 정보를 덧붙이고 또 다른 책을 읽을 때 자료로 삼으며 읽을 수 있어 좋았다.
역사책이며 ‘실록’이란 타이틀에 걸맞게 사실 위주로 서술한다. 저자의 관점은 있되 객관적으로, 당시의 복잡한 정세를 간결한 문장으로 군더더기 없이 진행하기 때문에 속도감이 있다. 이 속도감 덕인지 무겁게만 인식된 당시 시대를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긴박하고 역동적으로 대하게 된다. 하긴, 얼마나 역동적인 시대였던가.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 생겨나고, 정치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살던 데서 쫓겨나고 이름을 바꾸고, 나라가 바뀌고, 크게 분노하고 크게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어쩌면 그마저 따라가지 못해 어리둥절해하며 살았을 시대.
일제강점기의 전반적 상황을 아우르려 하지만 민중 생활사나 문화사가 중심은 아니다. 시대를 10년 단위로 나누고 시대마다 세계 정세, 일제강점기 정책과 한국 사회 변화, 시대별 주요 사건과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나누어 정리했다. 일제강점기 정책, 사회 변화, 주요 사건과 인물을 나누어 담아 나 같은 입문자는 이해하기가 더 쉬웠다. 일제의 정책과 총독 정보에서 일제강점기의 시대별 양상-사회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고 시대별 주요 사건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풍미한 인물 이야기에서 주관적으로, 머리보다 마음으로 시대상에 접근하게 된다.
저자는 사건마다, 시대상마다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안타깝다거나 억울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감정을 많이 실지는 않는다. ‘안타깝다’는 말도 객관적 사실로 쓰인 정도다. 서술이 군더더기 없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읽어 내려가며 감정의 소모가 적어서 일제강점기 역사임에도 읽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속도감이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거침 없이 일제강점기 시대를 한 맥으로 이어간다. 저자는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읽고 쓴 걸까. 이 시대를 골목길 저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한 시대를 관망한다.

큰 그림부터 사람 이야기까지, 당시 시대상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구성
세계 동향
저자는 먼저 가장 큰 그림을 보여 준다. 세계 동향이다. 10년 단위로 나누어 간략히 정리했는데 이 부분만 모아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사를 보는 셈이 된다. 우리는 우리 상향을 보기에도 버겁지만, 당시 식민지, 개항, 민족 독립 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고 대공황, 사회주의, 민주주의, 제국주의는 세계가 연결되는 틈을 타고 전해지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또한 그랬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찍 서양의 문물을 수입하고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 침략 정책까지 고스란히 수입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맺고 조선을 개항시키는데 이는 “미국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수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제 통치 / 한국 사회의 변화
이 부분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대한제국을 어떤 과정으로 침략하고 국권을 강탈했는지, 또 어떤 식으로 한국인의 권리를 짓밟았는지를 서술했다. 경제 수탈, 전반적 통치, 문화 억압은 식민지 후기로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데, 193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민족말살정책을 폈고 1940년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일제의 억압 정책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양상도 달라졌다.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것은 이 시절 한국 사회의 전반적 변화를 간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참혹한 시절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근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고 인구는 늘고 산업에서는 기계화가 시작되었다. 공장이 많아지고 공장 종사자가 증가 속도가 빨랐으며 공교육 제도를 체계화했다. 물론 이런 제도의 시행과 경제 변화의 주축은 일제였다. 목표 또한 일제가 자신들의 부를 늘리려고, 한국인을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기르려는 것이었다. 자발적 근대화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하물며 식민지가 된 국가들은 어떨까. 스스로 선택하거나 자발적으로 경험하거나 실패할 기회도 없이 억지로 주어진 경험에 허덕이고 근대를 앞서 경험한 국가에 더 착취를 당했다. 이런 점이 지금도 우리가 일제강점기를 트라우마로 기억하는 이유가 되겠지만, 바로 이 때 한국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에 일부러라도 주목해야겠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제, 산업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노동 종사 영역도.
또 다른 이야기 - 시대별 주요 사건
이 책에서 민중 이야기, 문화사, 생활사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앞에서 말한 일제의 국권 수탈, 통치 양상의 변화, 한국인의 저항과 새로운 정부 수립의 갈망이 가장 중심이 되는 흐름이다. 여기에 보다 구체적인 각 시대별 주요 사건, 시대를 풍미한 인물은 사실과 통치 위주로 기록되는 실록에 생동감과 현장감을 불어넣어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 일본이 철도부설권을 대가로 맺은 간도협약, 삼일운동, 간토대학살, 백백교 사건, 제주 해녀들의 경찰 주재소 습격 사건, 소작쟁의 등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을 뽑아 놓았다.
국사 시간에 배운 것들, 지금은 키워드만 간신히 기억하는 역사적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었고 지금껏 알지 못했던 사건을 접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자유시참변은 처음 알게 된 사건이다. 1921년 6월, 여러 파벌의 독립군 사이에 일어난 지휘권 다툼 때문에 백 명이 넘는 독립군이 러시아군에 사살되었고 수천 명의 독립군이 무장해제된 일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저 긴박한 시대에, 간절한 바람을 갖고 모인 이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지휘권 다툼을 벌일까 싶었다. 그런데 곧 이런 생각을 했다. 목표는 같고 의지는 강했으나 사상도, 방법도 서로 다른 이들이다. 어쩌면 그 의지와 목표가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서로 겨뤄볼 여력도 되지 않았기에 이런 참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러자 이 또한 절박한 시대가 몰아붙여 일어난 참사로 보였다.
자유시 참변이 안타까운 사건의 대표적 예라면 완바오산 사건은 예나 지금이나 간과할 수 없는 언론의 어두운 면을 보여 준다. 이것은 중국의 완바오산 싼싱바오에서 일어난 사건을 조선일보 기자가 잘못 보도하는 바람에 한국인이 한반도에서 수백 명의 중국인을 살해하거나 해한 일이다. 처음에 중국인 하요융더가 자신도 임차한 땅을 한국 이주민에게 재임차한 일은 잘못이나 그 이후 그 땅에 수로로 건설하려고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의 양해나 허락을 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고 수로 완성까지 강행한 것은 한국 이주민의 잘못이었다. 이런 내막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중국인이 한국 이주민이 건설한 수로를 파괴했다는 기사를 호외로 발행했으니, 역시나 내막을 알지 못하는 한반도에 있는 한국인이 중국인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자유시 참변이 시대가 만든 비극이라면 완바오산 사건은 시대보다는 언론과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풍미한 인물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이 시대의 한계가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다양한 인물을 뽑아서 보여주는데, 국권 수탈 시기인 1910년대까지는 일본의 편에 서서 매국에 앞장 선 인물을 정리했다. 이완용, 송병준, 윤덕영, 이지용 등이다. 이후에 소개되는 인물은 나철, 박은식, 이승훈, 김좌진 등 독립운동을 하거나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애쓴 인물이 많다.
그중 마지막으로 나오는 인물은 윤동주다. 교토지방재판소에서 2년 형을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당시 윤동주의 유죄 사유는 이렇다. “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문화적으로 깊이 빠져 있었으며,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일본과 한국)의 차별 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망동을 했다.”
참 이상한 말 아닌가.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단적으로 짐작하게 하는 판결문이다. 어딘가에 태어나 그 땅의 문화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사는 땅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걸 망동이라 하다니, 일제강점기에 살았다는 것은 이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조차 잘못이 되는 이상한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구나. 통치가 막바지에 달할 수록 고문, 징병, 가혹한 수탈로 살고 죽는 것조차 일제가 좌지우지했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부정적 감정을 벗어나 다양한 관점으로 들여다보기
저자는 지배와 저항의 논리로만 일제강점기를 보지 말라고 한다. 저자의 말과 의도에 호응하지만 이렇게 보려면 나는 아직 훈련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일제에 넘기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분명 고질적인 문제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바탕이 되어서 일제강점기가 결정적 트라우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보아도, 일제강점기에 분명 결정적 트라우마가 형성된 것은 맞고 그것이 지금까지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 시절의 잔혹함, 암울함, 무지가 그 시대를 상처투성이로 기억하게 만들었으며 그때 비롯된 사고 방식, 발전 방식, 새로운 문물의 수용 방식, 그때 형성된 사회 체제 등이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들어가는 말' 중. 저자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 좋은 관점을 제시해 준다.
중요한 점은 이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일제강점기가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보고 덮을 시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 시절이 트라우마의 시작점인 것을 알지만 또한 이때가 전통시대를 마무리짓고 근대를 거쳐 현대로 오는 변화의 시작점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싶다. 사회 변화, 생각의 변화, 독립운동의 기개를 더 들여다보며 그 시대의 역동성을 느껴보고 싶다.
하나 더 덧붙인다. 서두에 창덕궁 얘기를 했는데 훼손된 유적지, 유물이 다 일제강점기 때 그렇게 된 건 아니다. 전쟁통에 다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근현대라 부를 시기, 전쟁 이후 한창 도시화, 서구화에 치중하던 20세기 중후반에도 유적지 훼손은 일어났다. 우리 전통의 것을 어여삐 보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버릇이 일제강점기 때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물리적 훼손이 다 일제강점기 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런 점을 더 살피며 일제강점기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역사를 재구성하고 싶다. 이건 내 일이다. 한 명의 독자인 내 일. 그래서 이 책은 한 번에 끝낼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볼 책인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아야 할 게 많고 깨야 할 것이 많으며 밝혀야 할 것이 많다. 작가들이 하나하나 다 발굴해 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스스로 해야 할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