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 즉 개연성이 좋은 소설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레드 퀸 시리즈가 인기를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메어가 그렇게 행동 할 수 밖에 없는 적절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계속해서 흔들리는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몰입감이 상당하다.
2.
이 책을 가상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10대의 로맨스만으로는 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은혈과 적혈로 나누어져 대립하는 세계는 불합리의 극치에 다다라 있지만 그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사람들은 그것이 적혈이건 은혈이건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보다는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부터 현실성을 갖는다,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인 킬런과 재주 많고 예쁜 동생인 지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스승은 한 명의 제자만을 둘 수 있고 그렇게 기술을 전수받는 이는 전쟁의 위험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삶을 살게 된다. 킬런과 지사는 고기를 잡고, 수를 놓는 도제로 은혈이 지배하는 그 사회에서 적절한 대우를 받으며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삶이 흘러가는 것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었다.
엇나가기만 했던 미운오리새끼같던 여주인공인 메어도 징병을 피할 수 없는 나이가 가까워오지만 메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위험이 아닌 킬런에게 어쩔 수 없는 징병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였다. 킬런을 감싸고 돌 수 밖에 없던 이유, 그들의 경험과 과거가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그를 대하는 방식은 2부 유리의 검에서도 일관성있게 지속된다. 여타 소설들처럼 메어는 우정이 아닌 사랑의 감정을 깨닫고 킬런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항상 나를 알아주는 친구, 어떤 상황에서는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밖에 없는 친구, 또는 그 역시도 사람이기에 나를 배신할 수도 있는 친구로 여긴다. 인물 하나 하나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으로 살아움직이기에 더욱 흡입력이 있다.
3.
"누구든 누구라도 배신할 수 있다."
이 문장이야말로 레드 퀸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 아닐까 싶다.
'새벽은 적혈처럼 붉게 타오르니, 일어나라.' 역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장이지만 이는 메어를 움직이게 하는 문장은 아니다. 적혈을 하나로 아우르는 혁명의 메세지에 불과하지만 메어를 둘러싸고 있는 온갖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메어를 상처주고 달리게 하고 강해지게 하고 다시 불안하게 하는 줄리언의 가르침이야 말로 메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메어는 2부 유리의 검으로 넘어오면서 더욱 철저히 그 가르침에 빠져든다. 부정적 경험이 배신에 관한 문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메이븐의 배신처럼 계획되고 잔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택할 것이라 믿었던 칼이 아버지를 택한 것도 함께 칼을 구할 것이라 믿었던 킬런이 잠시나마 자신을 가두는데 일조했다는 것도, 메어의 삶을 좌지우지할 큰사건에서부터 소소한 사건까지 배신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메어는 누구보다 혼자인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내 사람을 만드는 정치적인 사람이 되지 못했다. 킬런이 고백을 해왔을 때, 그가 예언처럼 "언젠가 너는 길을 잃게 될거야. 그리고 그 때엔 널 다시 돌아오도록 이끌어줄 내가 거기 없겠지."라고 말하며 등을 돌렸을 때 그 안타까움에 한동안 다음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메어는 전장에 나간 오빠들과 직업이 있는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겼고, 새끼오리처럼 생각하고 돌봤기에 킬런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며, 사방이 적인 왕궁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다 여겼던 메이븐에게 이용당했기에 더이상은 누군가 다가오는게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배신이라는 단어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된다는 것을, 메어는 그렇게 밀어내고 혼자 남겨져 있다고 생각함에도 배신을 당한다는 것은 분명히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4.
킬런의 고백에서도 작게 안돼라는 속삭임을 내뱉었다. 신혈을 구하러 갔다가 이미 메이븐의 손길이 먼저 닿은 죽음을 봤을 때도 갇힌 신혈과 은혈을 구하고 비행기의 코스를 바꿔 턱섬으로 갈 때에도.
이렇게 메어는 그리고 책 속에 상황들은 독자의 마음처럼 움직여주질 않았다.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어 헛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안된다거나 한숨을 쉰다거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거나 읽는걸 잠시 멈추게 하는 반응을 유발했다. 작가에게 알려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떤 영화보다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다고. 1부에서는 하우스들의 색색깔이 가득해서 그 화려함이 벅찼다면 2부에서는 더 어둠고 적색과 은색만이 남아 치열함이 더했다고. 또한 신혈들의 제각각인 능력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영화로 만든다면 상당히 볼거리가 많은 영화가 될 것 같다.
5.
메어가 아직도 새로운 것을 경험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은 나이이기에 새로운 세계와 더불어 자신 내면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이 더욱 역동적이다. 노련함보다는 낯설고 거친 느낌이 많다. 또한 그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의지만이 아니라는 것이 더욱 그럴싸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맹수 우리에 던져진 먹이였다. 각성을 한 후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살기 위해 은혈을 연기해야했다. 알려진 얼굴과 알려진 능력을 가진 첫번째 신혈이 되어 갑작스럽게 자신의 주변에 진홍의 군대가 모여들고 어느새 적혈의 구심점이 되어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자각한 스파이더맨이 고뇌를 거쳐 강한 힘엔 강한 책임이 따르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메어에게는 없었다. 그녀에겐 여름날 폭우를 만난 계곡의 물살처럼 급박하게 흐르기만 한다.
보통의 10대는 성적과 사랑과 외모에 대해 생각하며 성격을 형성해 나가는데 반해 메어는 선택의 여지없이 큰사건을 겪어야 했다. 팔리처럼 어떤 대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칼의 생각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쉐이드 오빠의 죽음(이라고 믿었던)이 아니었다면 진홍의 군대에도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오로지 자신을 배신한 메이븐에 대한 증오와 그보다 메이븐을 조종한 왕비에 대한 더 큰 분노가 메어를 움직이는 동력이라는 것이 메어가 10대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이런 캐릭터 설정이 다른 히어로들과의 차별성을 나타내준다.
누구든 지나는 10대, 그 흔들림. 경험이 부족하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과 판단. 외골수적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보고자 해서 봤던 소년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아니기에 가질 수 있는 증오, 눈 앞의 생명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움직이는 것이지 어린 적혈들을 구해야만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기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 그런 짧은 시각과 고집적인 면들이 메어라는 특별한 주인공을 만들어준다.
메어는 언제든지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녀는 메이븐처럼 아니 메이븐보다 더욱 잔인해 질 수 있다. 자신을 고통에 밀어넣은 은혈을 전기로 지지고 싶어 하고, 죽은 이들의 앞에서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아는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빌런이 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주인공인가. 고지식한 군인인 칼이 주인공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6.
왕비 없이 홀로서기를 하는 메이븐과 모든 것을 잃고 적의 적은 친구라서 함께하고 있는 칼과 그래도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메어의 친구일 킬런과의 사각관계의 행방을 지켜보는 것도 남겨진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죽으러 가는 어린 적혈들의 군대를 어떻게 구해낼 것인지도 기대되는 장면이다. 부디 3부의 소식이 빠른 시일 내에 들려왔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