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동물농장》은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한밤중 농장의 동물들을 모아 놓고 전날 밤에 꾼 이상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한다.
메이저는 동물들의 삶이 비참한 이유는 인간이 동물의 생산물을 몽땅 가지고 가기 때문이라며 인간을 몰아내야 한다고 한다. 며칠 뒤 메이저는 숨을 거두고 얼마 후 동물들은 무능한 주인 존슨 씨를 예상 밖으로 아주 싱겁게 내쫓아 버리고 농장을 차지하게 된다. 그들은 농장의 이름을 ‘동물농장’으로 바꾸고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는 구호 아래 ‘동물주의(Animalism)’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한다.
하지만 글자를 읽고 쓰는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돼지들은 어느 순간 권력을 잡고, 똑똑한 돼지 나폴레옹과 스노볼은 풍차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치열한 권력 싸움 끝에 승리한 나폴레옹은 스노볼을 쫓아내고, 무서운 개를 앞세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점차 완벽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다시 존슨 씨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며 불안을 조성하고, 불평하거나 항의를 하는 동물은 스노볼의 첩자로 몰아 숙청하기도 한다.
‘동물주의’를 간단히 줄인 ‘일곱 계명’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지워지고 덧씌워진다. 돼지들은 존슨 시대보다 훨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고, 동물들은 이전보다 한없이 고달픈 나날을 보내게 된다. 소설은 마지막에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이 어려운 상태에서 끝이 난다.
1903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벵골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유년기에 영국으로 돌아와 명문 사립학교 이튼스쿨에 입학하지만, 여기서 상처 가득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이후 버마(현 미얀마)에서 대영 제국 경찰로 근무하게 되는데, 이때 그는 영국 제국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이후 유럽으로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고 파시스트에 맞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오웰은 드디어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쓰게 된다.
아마도 그가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다면 구소련의 전체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동물농장》이나 정보가 통제된 암울한 미래 국가를 그린 《1984》와 같은 작품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볼셰비키 혁명에서 스탈린 독재 시대에 이르기까지 구소련의 정치 상황을 풍자한 《동물농장》. 작가는 작품에서 권력의 중심이 어떻게 이동하고 특권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놀랍도록 실감 나게 그려낸다. 인간이 누구인지, 동물은 누구인지, 독재자 나폴레옹과 그와 경쟁하다 쫓겨나는 스노볼은 또 누구인지. 은유와 비유가 이렇게도 적나라한 작품이 또 있을까?
소설에서 동물들이 농장을 차지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돼지들 몫으로 빼돌리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때 동물들이 침묵 대신 항의를 했었다면 권력의 타락을 막았을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오웰은 이 장면에 숨겨두었다.
자신들의 소중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의 시각에서 우리에게 전한다.
91년 냉전 시대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초강대국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힘을 잃고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다. 집권 기간 동안 수천만 명을 학살하고, 유배 보낸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최근의 한 설문조사의 결과, 절반 이상의 러시아인들이 스탈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소비에트 연맹에의 향수로 ‘강한 러시아’를 주장하는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여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려 했다는 명목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다.
소설 《동물농장》은 단지 구소련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삶 속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불편한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
이 작은 우화(寓話)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는 아직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