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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Haskell님의 서재
  • 야매 미장원에서
  • 조연희
  • 9,000원 (10%500)
  • 2016-10-20
  • : 41

비가 많이 온 다음날이었다. 젖은 낙엽이 보도블록에 질펀했다. 개중 검붉은 단풍하나를 주웠다. 잎맥을 따라 찢어진 단풍잎이 막 떠오른 햇살에 말라가고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있는 책 속에 끼워 넣었다.

 

오늘, 불현듯 낯선 남자의 스킨냄새에서 망각한 애인을 되살리듯 책갈피에서 단풍잎을 발견했다. 단풍잎이 꽂혀있는 자리는 조연희 시인의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의 「고도리」편이었다.

 

창밖에서는 쏴아 흑싸리 흔드는 소리가 들리고

그럴 때마다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2월 매화 열 끗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오빠가 집을 나간 건 기러기가 대이동을 하던 계절이었다.

팔월 공산의 세 마리 새처럼

그렇게 지붕을 넘어간 가족들

 

나는 칠월 홍돼지처럼 날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패야.

철마다 매화 벚꽃 난초 모란 국화가 피어나는

카키색 군용 담요는 한때 우리의 정원

우리 가족 다섯, 고도리처럼 다시 모여

함께 만두를 빚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삶은 뒤집어야만 볼 수 있는 패였다.

엄마가 찾고 있는 패는 없는 게 아닐까.

언니는 왜 섣달 비 쭉정이 같은 사내를 꼭 쥐고 있는 것일까.

 

얘, 누가 온 것 같아.

엄마는 끝나지도 않은 화투를 접으며 말했다.

열 끗 중 한 개의 패가 내 아버지였지만

아직도 난 내 패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 시 <고도리> 전문

 

10월에 나온 시집에 ‘10월 단풍’이 시 <고도리>에 꽂혀있는 운명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광’이 있는 붉은 국화나 꺾어 말릴 것을 그랬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시인의 말처럼 삶은 뒤집어 보아야 볼 수 있는 패이니 말이다. 그날, 그곳, 그 나뭇잎, 10월 단풍, 그 책, 그 시, 그 자리. 이제는 과거인, 현재였던 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나다운’ 일이 그 단풍을 주워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운명 같은 우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시를 읽는 것이다. 뒤집어보아야 알 수 있는 패이니 읽어보지 않고 무슨 수로 배길까. 오늘, 이곳, 이 자리, 야매 미장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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