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듯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는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입술이
달싹여지는 순간 이름은 만들어지는 언어가 아니라 새어나오는 소리였다.
아무리
붙들려고 해도 붙들리지 않는 끝내 터져 나오고 마는 소리.
동백꽃은 낙화의 과정 없이 그
생살을 잘라 툭 떨어진다.
죽음을
예고하지 않는 자,
지켜보는
이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조차 주지 않는 한 순간의 절명에 난 차마 눈물도 뿌릴 수 없다.
동백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는 건 동백 스스로 뿐,
그는
우리를 허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렇게 홀로
산문(山門)에
들어 죽고,
다시
산문을 나서며 태어났다.
그리고
그 죽음과 삶 사이,
아니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산사에서 ‘바다처럼
출렁이고 산처럼 무너지며’
한없이
낮아지다가 끝내 삼키지 못하고 흩뿌려지는 마지막 숨결을 거두어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숨결을 소리로 풀고 글로 적어 내려갔을 것이다.
보리암의
3층석탑은
‘나침반을
불구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자기가
지금까지 믿고 의지해왔던 그 나침반이’
‘한순간에
아무 쓸모도 없는 폐품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시인은 깨달았다고 한다.
자기부정!
안다는
것,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그
앎을 공고히 하는 것보다 부수어버리는 일이 더 힘겹고 용기가 필요함을 시인은 나침반에 빗대어 역설하고 있다.
문득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정한 베드로가 생각났다.
예수의 예언에 그는 죽으면 죽었지
예수를 부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했다.
그의
믿음에 대한 자부심은 붉은 침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았으리라.
그러나
곧 끌려가는 예수의 등 뒤에서 예수를 세 번이나 부정하고 만다.
붉은
침은 방향을 잃고 흔들렸을 것이며 그는 허물어지듯 엎드려 통곡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었습니다.
주여
제발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 세 번의 부정은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닌 자기배반,
자신을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들판에
자라는 풀 한포기와 다름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파헤쳐지는 나약한 한 존재로의 자기인식.
이
세상의 모든 선하고 악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들과 결코 내가 다르지 않다는 뼈아픈 자기고백.
어쩌면
모든 숭고한 삶은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는 처절한 자기고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그
끝에서 부복한 몸을 일으켰을 때 비로소 귀가 열리고 눈이 떠졌을 것이다.
그제야
아프고 고단한 삶 속의 사람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상을 보며 가슴으로 껴안아 흐느껴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담담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한없이 낮아지려던 그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나침반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의 붉은 침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나는 시인의 나침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시인은
시인대로 자신의 나침반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묵묵히 길 떠날 차비를 할 것이다.
시인이 끊임없이 산사를 돌며 생사를
거듭하는 것은 아마도 단단해지는 아상에서 벗어나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함일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답든 추하든 고개를 돌리지 않고 두 눈 부릅떠 낱낱이 해체해보려 함일 것이다.
그리고
‘금강저’를
든 티베트의 승려들처럼 자신의 해체된 정신을 단숨에 쓸어내 버리려는 것일 터였다.
나는 시인을
생각한다.
백지
같은 마음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을.
그
걸음은 빠르거나 느림 없이 단조롭고 허허로울 것이다.
그가
스스로
상처 입은 구슬이 되어 우리들 곁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영혼을
지닌 것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 속에는 영혼이 없’노라고
속삭인다.
또한
‘완벽한
세계를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인
것’을
완성으로 보는 인디언의 통찰’을
들려준다.
처음부터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노라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완벽할 뿐이’라고.
‘상처와
결핍을 인간의 완성을 위한 존재로 보는 인디언의 영혼’을,
‘이
세계는 인디언의 목걸이들처럼 어디든 상처가 있고,
그
상처가 하나라도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면,
그
세계는 완전할 수가 없다는’
화두를
건네고 있다.
나는 오늘 시인에게서 깨진 구슬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이
구슬로 목걸이를 만들던 만들지 않던 그것은 나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나는,
금계꽃을
들고 선 부처님을 보고 가만히 미소 짓던 가섭처럼 깨진 구슬을 들고 빙그레 웃고 싶을 뿐이다.
피었으므로,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