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 이키타의 딜레마
leonkim80 2008/07/1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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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탈 따위 생각하는 건 그만둬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왠지 그 녀석은 불안해
방귀 뀐 것까지 일일이 죄로 친다면 못 살지
정의가 인생의 지침이라고?
그렇다면 피로 물든 전쟁터에
암살자의 칼 끝에
어떤 정의가 깃들어 있다는 건가?
요조가 좋아하는 루바이야트의 시구이다.
방귀 뀐 것까지 죄를 물어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살았지만
평생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 요조.
그런 그에게서 일종의 자기 연민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객관적인 본인의 모습과는 별개로 요조의 딜레마적인 인생에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점은 바로 이 소설이 세계 문학의 한 켠을 장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그의 필명인 조시 이키타는 '정사(情死), 살았다'의 일본어로
살아있는 동안은 그를 괴롭힐 끝 간 데 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한 동반 자살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더욱 증폭된 죄책감의 딜레마를 잘 나타내준다.
그는 '너무 착한 사람이라, 그래서..' 처세술의 논리에 길들여진 인간들에 의해서 상처를 받고
술을 마시고 정사를 벌이는 것이라 호소하지만 한 편으로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의 씨앗이야, 라는 등 외곬으로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집과 약국 사이를 반미치광이처럼 왕복할 뿐이었습니다.' 라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조의 모습은 그 스스로 가장 먼저 못 박아 버린 인간 실격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그가 익살의 가면을 쓰고 견뎌왔듯이 우리 각자의 가면으로 가리고 싶어하는
우리의 상처 혹은 인생의 딜레마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조가 익살의 가면으로 가리고 싶어 한 것은 단지 그의 죄책감 혹은
흔하고 평범한 세상사도 수월치 않은 자신에 대한 열등감 뿐이었을까?
그가 숨기고 싶어한 것에는 그 혹은 우리 안에 내재한 모순된 우월감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이 그린 굉장한 자화상을 바보같지만 진실을 간파해내는 다케이치에게만 보여주고
내심 경멸해 마지 않던 호리키에게 멸시당하고서는 뿌리 깊은 열등감으로 항변하진 못하면서도
속으로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열등감을 느꼈던 것은 유치원에서 하는 학예회 때였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컸던 나는 각기 다른 연극에서 2가지의 배역을 맡아 활약을 했지만
아무래도 선녀 옷을 입고 말없이 부채춤을 추는 민지가 더 예뻐 보였다.
하지만 나를 총명하다고 여기셨던 원장 선생님의 주장으로 동시에 2가지 배역을 맡아
학부모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기억이 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 있어 우월감과 열등감이란 것은 꽤나 원초적이며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감정이다.
마치 인간의 원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세상에 난 듯이 죄책감에 압도되어 살아가는 요조는
이러한 원초적이고 모순된 감정들을 익살이라는 가면으로 숨기고 견디는 가운데 점점 더 고립된다.
그리고 스스로가 붙이기 시작한 인간 실격이라는 타이틀은 어느새 학습된 무기력 속에서
공인화되고 그 사실은 요조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되는데,
결국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고향 근처의 무너져내리는 시골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만이 인간 세계의 단 한 가지 진리라는 말로 그의 수기를 맺는다.
기구한 자신의 인생을 수기라는 형식으로 남긴 요조가 그 자신을 사형 선고 내리듯 선언하였던
인간 실격의 문제는 사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딜레마인지 모른다.
떨쳐버릴 수 없는 열등감과 우월감이 뒤섞인 감정 속에 우리는 인간 실격이 되지 않기를 열망하며
아둥바둥 살아가지만 서로가 데면데면한 무리의 한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위해 열심히 세상에 적응하고 내일을 준비하지만
때로는 이 인간 세상에서의 합격점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아, 대개의 인간이란 행복해질 수 없는 모순을 안고 태어나는 것일까?
후에 그의 수기를 읽게 된 남자가
'내가 이 사람의 친구였다면 나 역시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하자
그의 뒤를 봐 주던 마담은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라 되받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나게 되는데,
하느님같다는 말은 인간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인간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면야 곤란한 인생이 되겠지만
요조의 인생에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곤란하면서도 은밀한 즐거움을 준다.
'하느님같이 착한' 그의 인간 실격은 이 각박한 인간 세상에 적응하느라 억눌려져 있던
우리 내면의 천진한 감정과 생각들을 잠시나마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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